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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은 강제성을 지니기 때문에 경ㆍ론에 비해 전역이 늦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외래문화가 異域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道安은 한지에 初傳되었다는 安世高의 『義決律經』은 長阿含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장아함이 법장부의 것이라 보면, 이 계통의 율전은 일찍부터 한지에 유전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율전에 의거한 수계는 조위시기 曇柯迦羅가 『僧祇戒心』을 전역하고, 담제나 강승개 등이 법장부의 갈마법을 역출한 이후이다. 당시는 각 부파간의 율장에 공통점이 많았고, 한인들의 율전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대립의 소지가 적었기 때문에 계본과 갈마가 혼용되고 있었다. 5세기 초부터 남북지역에서 광율들이 전역되었다. 『십송율』이 최초로 전역되어 널리 수용되었지만 隋末唐初가 되면 『사분율』이 점차 대세를 이루었다. 『사분율』의 전역에 대해서는 「四分律序」와 僧肇의 「長阿含經序」가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승조의 기록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비록 412년에 『사분율』이 완역되었지만 북방에서는 6세기 초반까지 『마하승기율』이나 『십송율』의 영향이 더욱 강하였다. 법총는 北臺에서 최초로 『사분율』을 口述로 講釋하였다. 그는『담무덕갈마』로 수계하고 『승기율』을 닦았지만, 이후에 『사분율』로 전향하였다. 道覆은 법총의 강율을 듣고 최초로 ‘義疏’를 찬술하였다. 이것은 단편적인 찬술로 광대한 宗旨를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의소를 통해 『사분율』을 선양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들의 법맥을 낙양과 업성에서 유전시켰던 것은 慧光이다. 혜광은 소림사의 佛陀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불타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혜광은 도복의 『사분율소』를 口傳 받았다. 불타가 전한 율부는 충분하지 않아서 혜광은 처음에 『마하승기율』을 강의하였다. 하지만 혜광이 실제 명성을 얻은 것은 『사분율』의 홍포 때문이다. 효문제 이래로 불교도의 모반이 잇따르자 승속 양측에서는 보다 강력히 불교계를 통제야만 했다. 『사분율』의 전수자 혜광은 도유나가 되어 승속의 이익을 중제하면서 서서히 승단을 장악하였다. 혜광의 문하에서는 다양한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法上ㆍ慧遠ㆍ洪遵 등은 승관직 수행으로, 道雲ㆍ道暉ㆍ法礪ㆍ智首 등은 학승으로 주목된다. 전자의 홍준은 『승기율』이 대세였던 관중에서 『사분율』의 교세 확장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후자의 율사들은 혜광의 義疏를 본받아 자신의 의소를 찬술하였다. 특히, 지수의 『五部區分鈔』는 도운의 疏를 바탕으로 각 율의 異同을 궁구하여 그 폐립을 정하였다. 도선은 지수의 疏를 토대로, 법려의 疏를 참조하여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12권)』를 찬술하고, 남산율종을 개창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기존에 유행했던 『십송율』은 왜 『사분율』로 대체되었는가? 첫째, 승단 스스로가 敎界를 엄격히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5세기가 되면 불교계의 급팽창과 사원경제의 비대화로 교계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둘째, 세속 통치자들의 정치적 필요도 있었다. 연속된 전쟁과 가혹한 수탈로 백성들이 국가 호적을 이탈하여 사원으로 도피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불교계의 반정부활동이 지속되었다. 남북을 불문하고 통치자들은 강력히 교단을 통제하고, 사원경제력을 국고로 귀속시키고자 했다. 셋째, 불교계 내부의 사상적 변화이다. 5세기 이래로, 북방에서는 대승경전이 성행하였다. 특히 『사분율』의 기반이 된 『十地經論』이 유행하였다. 또한, 실천성의 강조로 ‘治塔’을 중시하여 불탑이나 사리탑신앙이 성행하였다. 여러 광율 가운데 『사분율』만이 불탑과 관련된 조항을 갖추고 있어 승단과 세속 통치자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세속 통치자들은 승단을 통제하는 방편으로 더욱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다. 6세기 중반부터는 『사분율』이 통치자의 지지를 받으면서 사분율승이 북방의 승단을 장악해 갔다. 그 결과 사분율승이 동위 이래로 승단을 이끌었고, 隋末唐初가 되면 북방에서는 『사분율』이 점차 주류를 이루었다.


The Spread and the cause of the Four Part Vinaya in the north during the 5th-6th century.


由于律藏具备强制性, 所以比经ㆍ论的传译相对较晚. 这是外来文化在别的文化圈为了扎根的必然选择. 根据道安的传言, 第一个在汉地传播的安世高的『义决律经』出自长阿含. 长阿含属于法藏部, 该系统的律藏在汉地流传比较早. 但根据律典的授戒开始了从曹魏时期昙柯迦罗传译『僧祗戒心』, 昙帝或者康僧铠等人译出法藏部的羯磨法之后. 因为当时每个部派间律藏的相似之处比较多, 汉人对律典的理解不够充分, 对立情况不多, 所以戒本和羯磨经常混用. 五世纪初, 南北地区传译了多种广律. 虽然『十诵律』最早被传译, 并且被广泛接受, 但是到隋末唐初之际, 『四分律』逐渐成了主流. 对于『四分律』的传译, 「四分律序」和僧肇的「长阿含经序」呈现出不同, 本人认为僧肇的记录更为妥当. 虽然412年『四分律』传译全部完成, 但是在北方到6世纪初叶为止『摩诃僧祗律』或者『四分律』的影响更大. 法聪在北台最早以口述的形式讲释『四分律』. 他受戒以『昙无德羯磨』, 以『僧祗律』修行, 以后转向『四分律』. 道覆听了法聪的讲律, 最早撰述了有关义疏. 虽然这部义疏非常简短, 不能解释广大的宗旨, 但是通过撰述义疏宣扬『四分律』具有一定意义. 慧光在洛阳和邺城流传他们的法脉. 慧光在少林寺的佛陀禅师门下出家. 佛陀强调了律法的重要性, 慧光受到了道覆口传的『四分律疏』. 因为佛陀传授的律法不够充分, 所以慧光刚开始时讲律了『摩诃僧祗律』. 但他因宣扬『四分律』而真正得到名声. 孝文帝在位时, 佛教徒的谋叛频繁, 僧俗两侧都需要对佛教界严格控制. 传受『四分律』的慧光以都维那调解僧俗的利益, 逐渐掌握了僧团. 在慧光的门下, 培养出了各种各样的弟子. 法上ㆍ慧远ㆍ洪遵等人担任过僧官职, 道云ㆍ道晖ㆍ法砺ㆍ智首等人以学僧身份受到关注. 前者洪遵的『僧祗律』在具有权势的关中地区, 为了扩张『四分律』的宗教势力, 打下了政治基础. 后者的律师们效法慧光的义疏撰述自己的义疏. 特别是智首的『五部区分钞』在道云的义疏的基础上, 更加深入研究个律的异同, 定下了其废立的标准. 道宣以智首的义疏为基础, 参照法砺的义疏, 撰述『四分律删繁补阙行事钞』, 打下了南山律宗的基础. 那么, 以往流行的『十诵律』为什么取代了『四分律』呢? 第一, 僧团本身需要对教团严格控制. 到了5世纪, 佛教界的急速膨胀和寺院经济的扩大引起了教界的危机. 第二, 世俗统治者的政治需要. 为了躲避不断的战争和残酷的剥削百姓逃离国家户籍躲避到寺院. 并且从4世纪后期到6世纪后期, 佛教界不断进行了反政府活动. 无论南北地区, 统治者都需要严格控制教团, 而且要把寺院经济力归属国库. 第三, 佛教界内部思想的变化. 从5世纪以来, 北方流行大乘经典. 特别是以『四分律』作为基础的『十地经论』. 并且强调实践性, 非常重视‘治塔’活动, 使得佛塔或者舍利塔的信仰盛行. 在多种的广律之中, 只有『四分律』具有有关佛塔的条项, 因而引起了僧团和世俗统治者的关注. 世俗统治者为了控制僧团, 要求更高的道德观念. 从6世纪中叶, 『四分律』逐渐得到统治者的支持, 四分律僧掌握了北方的僧团. 从而导致四分律僧从东魏以来领导僧团, 到了隋末唐初, 在北方, 『四分律』逐渐形成了大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