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열기/닫기 버튼

文字(造字)與稱謂(命名)均為上古王官制度,與物官、世官等等制度相關聯,其起源非一朝一夕之故。制度本身會有變遷,但是相對穩定,持續久遠,其整體史實無法造偽,因此具有可信性。由包括文字、稱謂之內的上古人文制度加以研究探討,可能是一條上古史實、古代文明、古代文獻的自證之路。



근년 이래, “主名山川”에 관한 문제는 문자학과 문헌학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연구되고 있다. 예를 들면, 臧克和는 『殷周金文資料庫』에 의거하여, “名”字 용법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는데, 『金文資料庫』에 의거하면 西周 中期에서 春秋 晚期까지 모두 ‘名’과 관련된 用例가 8군데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尚書·呂刑』에 ‘禹平水土, 主名山川’라고 적고 있고; 岩崎本傳文에는 ‘禹治洪水, 山川無名者主名之.’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모두 ‘主名’이 동사이다. 『大戴禮記·五帝德』안에는 禹‘主名山川’라고 적혀 있고, 같은 책에 또한 禹‘巡九州, 通九道, 陂九澤, 度九山, 為神主, 為民父母’라고 언급하고 있다. 裘錫圭는 『文史叢稿·說‘格物’』에서 ‘主名山川’의 ‘主名’은 대략 병렬 구조로 인식하고, ‘主’은 山川의 神의 祭主이고 ‘名’은 山川定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裘錫圭가 인식한 “主名山川”의 의미는 禹가 이미 主祭山川의 神이라는 것이고, 또한 山川命名이라는 것이다. “祭主”와 “主祭”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裘錫圭가 주장한 “祭主”는 아마 “主祭를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1925年, 王國維는『古史新證』에서 두 종류의 春秋時期 銅器銘文인, 『秦公敦』“宅禹跡”과 『齊侯鎛鐘』 “咸有九州, 處禹之堵”를 제출하여 “古書의 部分은 전부 實錄이다”ㆍ“일면의 事實을 조금은 표시하고 있다”를을 증명하는 한편 “地下의 新材料”로서 “紙上(문헌)의 材料를 補正한다”라는 저명한 “이중 증거법”을 제기하였다. 2002年 保利博物館에서 구매한 青銅器燹公盨 안에는 98字의 銘文이 있는데 篇首에 “天命禹尃土, 隨山濬川”라고 적혀 있다(李學勤 先生의 釋文을 이용). 이 명문은 王國維 이후 禹와 직접 관계있는 증거였다. 근년 이래, 李學勤ㆍ裘錫圭ㆍ饒宗頤 등 저명학자들이 광범위하게 토론하였으나 관점은 서로 갈렸다. 예를 들어, 周寶宏은 顧頡剛ㆍ劉起釪ㆍ董楚平의 관점을 증거로 銘文의 함의는 “大禹治水ㆍ開山疏導河流의 故事가 아닐 뿐 아니라, 帝命天神禹用息壤(或土)堙填洪水의 神話도 아니고, 天命天神禹創造大地ㆍ高山ㆍ長河的辟地의 神話”라고 하였다. 周寶宏은 아울러 顧頡剛의 禹有神性說에 대해 이러한 결론은 초기 문헌 기재와도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社會의 市場化ㆍ學科專業化의 정도의 심화에 따라 神話學ㆍ宗教學ㆍ民俗學 등의 학과는 각자의 입장에서 古史 연구를 하고 이런 까닭으로 出土 文獻은 갈수록 많아지고, 학술 관점은 나날이 복잡해지는 국면에서 王國維 等의 학자들의 始料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문자(造字)와 칭호(命名)는 모두 上古의 王官制度로서 物官ㆍ世官 등의 제도와 서로 연관이 있고 그 기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制度 자체는 변천을 겪었으나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그 총체적 史實을 위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뢰성이 있다. 문자ㆍ칭호 안에 포함되어 있는 上古의 人文制度에 研究 探討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上古史實ㆍ古代文明ㆍ古代文獻의 自證之路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