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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초 푸졘(福建) 성 핑허(平和), 룽시(龍溪), 타이완(臺灣) 등의 지역사회와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던 관리들은 중국의 북부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들 지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격렬한 계투가 자주 발생하였다. 핑허, 룽시 현은 청조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였다. 두 현의 종족은 관청을 자신들의 생존방식에 간섭하려는 훼방꾼으로 여겼다. 일반 백성들은 관청의 세금징수에 저항하였지만, 종족의 횡포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관청의 정책은 임기가 1-2년이었던 지현(知縣)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지만, 종족의 세력은 다소 기복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백성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관청의 힘이 약하고 종족의 힘이 강한 상황을 청조의 통치력이 약해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지역의 계투는 청조의 통치력이 약해졌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명대 이래 이 지역에서는 종족과 국가 사이에 지속적으로 갈등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편이 더 낳을 것이다. 이점은 우리에게 국가가 이들 지역을 19세기초까지 명실상부하게 통치한 적이 있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다음으로, 리겅윈(李賡芸) 사건은 지역신사가 관리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겅윈의 결백함을 주장하였던 신사들은 그의 억울함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하여 리겅윈의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나중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시창(熙昌), 부도어사(副都御史) 왕인즈(王引之)가 현지에 왔을 때는 이미 당사자는 죽고 관리는 사임하고 신사들은 원통함을 호소하는 상황이었다. 시창과 왕인즈는 결국 사건의 진위를 조사할 수 없었고, 걸핏하면 일을 크게 만드는 지역신사들을 회유할 수 밖에 없었다. 끝으로, 19세기초가 되면 타이완이 청조의 영토가 된 지도 이미 150여년이 흘렀지만, 현지의 관리들 사이에는 병사들의 모집이나 군량미의 확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19세기초 관리들은 대체로 타이완을 완전한 청조의 영토로 보지 않았고, 반대로 타이완이나 그 주민들을 엄격히 감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경도광(嘉慶道光) 연간이 되면서 타이완의 주민은 이미 200여만명으로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상인들이 과거처럼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매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이완에 대한 경제적 매력도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