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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이후 불안으로 치닫던 중국사회는 한층 가속화된 내우외환의 격변속에서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불안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보다 강대한 모습의 근대국가를 희구하게 되었고,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보려 하였다. 그래서 기존의 중국문화는 일체 부정하거나 그 가치평가를 유보하려는 현상이 만연했고, 그러는 사이 서양의 온갖 문물과 사상은 아무런 여과과정 없이 마구잡이로 수입되었다. 이렇게 전통문화의 권위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와중에 『신청년』 사단은 반전통의 낭만주의를 창도하여 당시 사상의 주류로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오사운동 이년 반만에 창간된 것이 바로 『학형』(이하 학형파 동인과 잡지 양자를 일괄하여 학형이라 부른다)이었다. 학형 사단은 북경을 근거지로 하는 신문학운동가들과 구별되어져 ‘학형파’라고 일컬어졌다. 미국 사상계에서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어빙 배비트(Irving Babbitt)의 제자인 매광적, 오복, 호선숙 등이 남경의 동남대학 교수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 기회가 되어 ‘국수를 밝히고 신지를 포용하자(昌明國粹, 融化新知)’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실험주의, 백화문학의 헛점을 폭로하려 했던 것이다. 쌍방의 논쟁은 치열하였고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씌어진 문장도 적진 않으나, 그 결과부터 놓고 보면 시대의 급변이 ‘학형’을 열세에 있게 하여 중국현대사에서 그들은 보수파로 분류된다. 그래서 그들은 신문화운동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조연으로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