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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禮에 대한 經文은 『儀禮』에 수록된 喪禮의 규정을 뜻한다. 喪禮에 대한 記文은 『儀禮』에 수록된 記文과 傳文 및 『禮記』에 수록된 喪禮의 기록들을 뜻한다. 고대 儒家의 喪禮 규범은 『儀禮』에 수록되어 있다. 記文은 『儀禮』의 經文 기록에 대해서 해설을 하거나 『儀禮』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을 보충하는 형식의 글이다. 그러나 高堂生이 전수한 『儀禮』는 극히 일부분의 禮制만을 수록하고 있다. 高堂生 이전 戰國時代 魯나라에는 다양한 禮制의 經文과 記文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기록들 중 일부가 『禮記』의 기록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禮記』에 수록된 喪禮의 記文은 그 성립 시점에 대해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類型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孔子 사후 魯나라에 남아있던 儒家에서 작성했던 기록들이다. 두 번째는 焚書坑儒 이후 前漢 때에는 각 계층에 대한 禮制를 정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작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구두로 전승된 『儀禮』가 대체로 士 계층의 禮制를 수록하고 있으므로, 이 기록을 기준으로 상위 계급에 대한 禮制를 새롭게 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古文經典을 통해서 禮制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세 번째는 『儀禮』를 전수했던 經師들의 주석이다. 본 논문에서는 세 유형 중 첫 번째 유형을 분석하였으며, 이것을 통해 戰國時代 魯나라에는 다양한 禮制가 발달되었음을 추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禮記』의 文獻은 「檀弓」편이다. 「檀弓」편에 기록된 일부 喪禮의 규정은 『儀禮』의 규정 및 『禮記』에 수록된 다른 편의 기록과 상반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檀弓」편은 『禮記』의 편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孔子의 제자 및 再傳 제자들의 일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孔子 사후, 魯나라에 남아있던 儒家 학파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檀弓」편이 『儀禮』의 기록을 기준으로 새롭게 정립된 禮制를 수록한 글이거나 『儀禮』의 經師들이 해설했던 글이었다면, 『儀禮』의 규정에 위배되는 내용들이 수록될 수 없다. 「檀弓」편을 戰國時代의 記文이 수록된 편으로 규정한다면, 古文經典을 통해 禮制를 복원한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前漢時代 때 필요로 했던 禮制는 「檀弓」편의 기술처럼 단편적인 기록들이 아니며, 각 계층에 맞는 층차적 禮制였다. 따라서 古文經典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記文들은 일종의 加減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天子를 정점으로 각 계층의 禮制가 차례대로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檀弓」편은 체계적인 규정들을 수록하고 있지 않으며, 戰國時代 때 활동했던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를 통해서 喪禮의 규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檀弓」편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기록들은 前漢時代 때의 加減이 개입되지 않은 戰國時代 魯나라에 남아있던 古文經典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喪禮における經文とは『儀禮』に収められた喪禮の規定のことである。喪禮における記文とは『儀禮』に収められた記文と傳文および『禮記』に収められた喪禮の記錄のことである。古代儒家の喪禮規範は『儀禮』に収められている。記文とは、『儀禮』の經文記錄について解說をしたり、『儀禮』にはない內容を補足したりする文章のことである。ところで、高堂生が傳授した『儀禮』はごく一部の禮制だけを収めている。高堂生以前、戰國時代の魯にはさまざまな禮制の經文と記文があったとされ、このような記錄の一部が『禮記』の中に編入されたと思われる。『禮記』に収められた喪禮記文の成立時期がいつなのかは判斷しにくいが、その類型については次の三つに要約することができる。第一、孔子死後の魯に殘っていた儒家が作成した記錄である。第二、焚書坑儒以降、前漢時代には各々の階層に對して禮制を整える作業が二通りに進められた。一つは、口頭で傳承された『儀禮』が大體に士階級の禮制を收錄しているので、この記錄を基にして上位階級に對する禮制を新しく制定したものである。もう一つは古文經典を通じて禮制を復元したものである。第三、『儀禮』を傳授した經師の註釋である。本稿では上の類型の中で第一の類型を分析し、その分析を通じて戰國時代魯にはさまざまな禮制が發達されていたことを推論する。『禮記』の内部でこのような狀況がもっとも鮮明に現れるのは檀弓篇である。檀弓篇に記錄された喪禮規定の一部には、『儀禮』の規定および『禮記』の他篇の記錄と相反したりする內容が見える。また檀弓篇には多くの人物が登場し、そのなかには孔子の弟子および再傳弟子の說話が見える。これは、孔子死後の魯における儒家學派の樣子を斷片的に表す記錄だと言える。もし檀弓篇が『儀禮』の記錄を基にして新しく定立された禮制を收錄したものであったら、それとも『儀禮』の經師の解說だったとしたら、『儀禮』の規定に反する內容は收錄されていないはずである。檀弓篇を戰國時代の記文が收錄された篇として規定するならば、古文經典を通じて禮制を復元したことと關聯される。しかし、前漢時代に求められた禮制は、檀弓篇のように斷片的な記錄ではなく、各階級に合う層差的禮制であった。したがって古文經典を復元する過程で現れた記文は、ある程度加減があった可能性が高く、天子を頂點とする各階級の禮制が順番に記述された可能性が高い。しかし檀弓篇は體系的な規定を收錄しておらず、戰國時代に活動した多くの人物の說話を通じて喪禮の規定を說明しているだけである。したがって檀弓篇の記錄は前漢時代の人の手が入らない戰國時代の魯に殘っていた古文經典だった可能性が高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