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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학”(国民文学) 1945년1월호・2월호에 발표 된 최재서(崔載瑞)의 일본어 소설 “민족의 결혼”(民族の結婚)은 13세기 말에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에 의해 쓰여진 사찬(私撰)사서인 “삼국유사” (三国遺事)및 조선반도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관찬(官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国史記)”(1145년)에 기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사소설이다. 그러나“삼국유사”나“삼국사기”에 원래 기록된 것은 각각“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및 “문무왕(상)”(文武王(上))의 문장 속에서 어느 것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민족의 결혼”은 이야기의 틀 만을 빌리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최재서의 창작이라고 해도 좋다.이렇듯 기본적인 설정만을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기초로 한 “민족의 결혼”이지만 최재서는 그 내용을 깊게 파고들어 당시의 식민지지배라는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서나 식민지치하에 있는 조선이라는 자국에 대한 조선인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까지도 엿보게 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최재서는 1945년도까지 일본어소설을 5편 썼지만 그 5편은 자신이 편집발행인으로 있었던 “국민문학”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보도훈련팀(報道演習班)”,“부싯돌(燧石)”,"즈키시로군의 종군(月城君の從軍)", “비시의 꽃(非時の花)” 그리고 “민족의 결혼” 의 5편이다. 조선인 모두 징병제가 결정되고 총동원체제가 가열화되어 가는 가운데 “국민문학”도 또한 집필자가 줄고 잡지의 존속이 위험해 질 때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이 작품 중에서도 “보도훈련팀(報道演習班)”과“부싯돌(燧石)”,"즈키시로군의 종군(月城君の從軍)"은 시국소설이며 노골적인 전쟁찬양과 황국찬양이 곳곳에 쓰여져 있는 것도 있어 작품으로써는 깊이는 없고 예술성도 낮게 평가되고 있다. 한편으로“비시의 꽃(非時の花)”도 역시 일본찬양과 황국찬양이 곳곳에 쓰여있어 이 소설들이 작품적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의 깊이와 예술성은 “민족의 결혼”와 비교했을 때 저급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민족의 결혼”은 이데올로기의 티가 나지 않고 노골적인 일본찬양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점부터도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성은 상당히 높고 최재서의 일본어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1941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발행된 식민지시대 마지막 문예잡지인 “국민문학”의 편집발행인인 최재서는, “국민문학”이 일본어잡지라는 잡지의 성격에서 봤을 때 ‘조선어말살’이라는 총독부 통치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친일적성향의 인물이다. 라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그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의 상황에 처해 생각해 보아도 이러한 일원적인 견해로 끝날 정도로 단순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족의 결혼”에서 보았을 때 또한 신라에 통합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인 주인공 ‘김유신’이, 신라의 무장이면서도 가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그 생각, 또는 다양한 갈등과 알력이 그려져 있지만 그런 주인공 ‘김유신’의 내면에도 최재서의 복잡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을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1945년 전쟁 말기 당시의 사회 상황과 “국민문학”지를 둘러싼 환경 등을 포함해 모두 고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