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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은 1896년 2월 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인한 온건 친일 내각의 몰락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의 망명 생활 동안 동경정치학교의 청강생이 되어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강의를 수강했다. 1898년 10월 개교한 동경정치학교는 저널리스트(신문기자), 정치가, 외교관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이 학교는 철저한 실무교육을 중시하는 학교로 특히 신문기자의 양성에 힘을 쏟았다. 都新聞에 있는 글들에는 이인직이 가졌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당시 이인직이 가진 조선에 대한 인식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에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 탓이다. 이인직이 수용한 사회진화론의 근간은 국가를 중요시하는 사회유기체설이다. 이인직이 수용한 이러한 논리는 일본이 계몽의 모델로 설정되며, 결국 일본의 통치를 수용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Lee InJik's Recognition of Reality and it's Contradiction― focusing on his life before study abroad and his articles on Miyakoshinbun[都新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