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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在 瓚 양주동은 시인이요, 비평가요, 수필가요, 번역가요, 국학자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식인이자 국어교육의 한 권력으로서 우리 세대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 연구는 그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근대 문인으로서, 특히 시인이자 비평가로서의 전개 과정을 실증적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양주동의 처녀시는 1923년 개벽에 발표된 <어느 해>로 보인다. 그러나 역시 그의 본격적인 시작은 자신이 주재한 금성의 창간호에 실린 작품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시에 대해 일반적으로 세기말적, 예술지상주의적인 특징을 그 주된 경향으로 손꼽지만, 우리 시단의 초창기를 담당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많은 시적 결함을 노출하고 만다. 관념의 과잉과 감수성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는 <금성> 시기를 끝으로 세기말 사상의 시적 표현에서 멀어지게 된다. 춘원과의 논쟁으로 비평계에 데뷔한 양주동은 이후 순수문학파와 프로문학파 사이의 우익 중간파로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비평 이론을 부단히 시작을 통해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감상적 경지에서 벗어나 적극적 생활 태도를 견지해 나갈 때, 그가 닿은 곳은 결국 또 관념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 나아가 여기에 이념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시는 계몽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특히 절충주의 입장에서 프로 문학의 형식에 우익적 내용을 담은 시 작품들은 절충주의가 미학적 이론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성실성과 치열함을 인정하는 데 결코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평적 논쟁과 시적 실천을 그처럼 부단히 연계하며 병행한 근대 문인은 매우 드물다. 근대 문인으로서의 그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 그것은 그에 대한 우리 세대의 예의이자 책임이다.


A Study on Yang Joo-dong’s Poetry and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