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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선상기(選上妓)에 의해 궁중 정재와 민간의 연희가 서로 교섭되는 양상을 밝힘으로써 ‘상하층 문화의 상호 교류’라는 균형적인 영향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다. 전문적인 악가무(樂歌舞)를 필수조건으로 하는 정재의 특성상, 궁중에는 오래 전부터 이들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던 기관이 존재했으며, 여기서 배출된 기녀들이 오랜 기간 동안 궁중의 정재를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에 따라 3장에서는 궁중 정재 연행의 주체였던 기녀들이 뽑혀 올라오고 다시 돌아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使料)를 찾아서 궁중 정재가 지방 관아로 전파되는 시기를 확인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기부터 정기적으로 지방에서 뽑혀 올라와 ‘경기(京妓)’으로 일하던 기녀들이 다시 자신이 속해 있던 관아로 돌아가면서, 궁중의 정재를 지방 관아로 전파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진연이 있을 때만 잠깐 서울로 올라와 정재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자신이 속해 있던 관아로 돌아가는 예가 잦아지면서 궁중 정재가 지방과 민간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정재(呈才)를 위해 서울에 왔던 안주기(安州妓) 양대운(陽臺雲), 그리고 공주기(公州妓) 해월(海月)의 예를 통하여 기록상으로도 명확하게 여기들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귀향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궁중 정재의 모습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평양, 안주, 의주, 선천 등지와, 진주 교방에서 연행되었던 정재는, 의상과 연행 규모 면에서 궁중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4장에서는 반대로 민간의 연희가 궁중으로 들어온 예를 찾았다. 검무와 항장무사자무관동무와 같은 것은 궁중보다 민간에서 먼저 연행되었는데, 이들 연희가 궁중으로 들어온 데는 지방에서 올라온 여기(女妓)들이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나 민간의 연희가 궁중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연행 장소와 참여 계층이 다르고, 연행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민간에서 연행하던 것과 같은 내용과 형식으로 공연할 수 없었다. 궁중이라는 특정 장소와, 왕실이라는 특정 계층을 위해 연행할 수 있도록, 연행 규모는 커졌으며 의상도 화려해지고, 정재에 참여하는 여기의 숫자도 많아졌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조선시대에는 선상기에 의하여 궁중의 연희가 민간으로, 민간의 연희가 궁중으로 유입되면서 상하층의 문화가 상호 교섭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