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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1130-1200)는 理學을 集大成했다. 그는 유학의 이념적 향방을 확정했고, 理學 개념 체계의 정합성을 이루어냈다. 栗谷(1536-1584)은 朱子學者이다. 그는 朱子보다 406년 뒤에 태어났고, 中國이 아닌 朝鮮에서 활동했다. 栗谷은 이미 確立되어 있는 朱子學을 祖述하는 일, 바로 이해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 理念과 志向을 조선의 現實상황에 政治와 敎育을 통하여 구현하는데 노력했다. ‘氣發理乘一途’, ‘理通氣局’ 등이 理와 氣에 관한 논쟁에서 율곡이 취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자는 70평생 鄕村에서 學問에 從事했다. 南康軍知事와 浙東提擧 등의 高位職에 잠시 나간 적이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한갓 名譽職인, 그러나 家計에는 큰 도움이 되는 祠祿官으로 있으면서 同僚·門人들과 學問에 종사했다. 율곡은 일생 주로 朝廷의 큰 정치에 從事했다. 一國 정치의 득실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말과 같이 나아가서 조정에서는 行道에 전념했고, 물러서 향리에서는 垂敎에 間斷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眞儒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朱子와 栗谷은 두 사람은 모두 일생 聖人을 목표로 學問을 하였다. 두 사람은 이제 匹夫와 골목(閭巷)에서조차 끊어져 버린 聖統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充溢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匹夫聖人論은 곧 萬人聖人論으로 확산되었다.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학문은 毋欺의 철학, 實理와 實心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성인의 학문은 이를 바탕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일생 固窮했다. 窮乏한 삶이 그의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祠祿官이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生計를 위한 苦心에서 벗어나 학문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른바 ‘窮居不損’이 주자의 모습이었다. 율곡 또한 朝廷의 大官을 歷任할 때나 외직의 목민관을 담당할 때에도 또 물러나 향리에서 학문에 종사할 때도 평소의 모습과 뜻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른바 ‘大行不加’의 삶이 율곡의 경우이다. 朱子는 중국에서 聖統을 확립하여 유학의 向方과 正體性을 다듬었다. 율곡 역시 伏羲에서 朱子에까지 이르는 道統을 밝히는 일면, 한국에서 箕子 以來의 道統을 밝혀 조선 학자들에게 푯대를 제시했다. 그것은 유학의 본령이라고 본 修己治人에 충실한 것이요, 사회와 정치적 현실에 道學의 理念을 구현하는 향방이었다.



朱子(熹,晦菴1130-1200)是理学的集大成者。他确定了儒学的理念方向,并实现了理学概念体系的整合。李栗谷(珥, 1536-1584)是一位朱子学者,他比朱子晚出生406年。他不是在中国,而是在当时的朝鲜进行了活动。栗谷致力于传授已确立的朱子理学,即对朱子理学的解读。并且,他为了使那些理念和志向通过政治和教育来体现在当时朝鲜的现实情况上而进行了努力。“气发理乘一途”、“理通气局”等提法就体现了栗谷在关于“理”、“气”的论争中所持的观点。 朱子平生70年,都在乡村从事学问活动。虽然短暂出任过“南康军知事”、“浙东提擧” 等高职位,但几乎大部分生涯都是作为只是名誉任职,但却对维持家计有很大帮助的祠禄官来和同僚及门人等从事学问。栗谷一生主要从事朝廷的国家大政。说整个国家政治的得失都掌握在他的手上也不算过分。但是他连同自己的言论在朝廷的时候专心实行自己的政治主张,退职在乡村时也从未间断过传授。他认为这是“真儒”所必走的道路。 朱子和栗谷两人都是以作圣人为人生目标从事学问的。这两个人把传承发扬连在一般小市民当中和弄巷之间都已经几近消失的“圣论”作为自己的使命从而度过了自己的一生。这样的“匹夫圣人论”很快扩散为“万人圣人论”。终归来说,这两个人的学问是“毋欺”的哲学,是志向“实理”、“实心”的。他们追求的圣人的学问也是因为以此为基础建立的。朱子一生穷困,但是穷困的生活并未改变他的理想。他聪明地利用了“祠禄官”这样的制度,不必为了生计而费心,从而能够从事学问。所谓“穷居不损”就是朱子的形象。荣华也未能改变他的气概。栗谷也是不论是担任朝廷大官还是在外地偏僻地区作牧民官,或退职在乡村从事学问都从未丧失自己平时的形象和理念。所谓“大行不加”的一生就是说的栗谷的情形。 朱子在中国确立了圣统,并修整了儒学的方向和正体性。栗谷也是一面阐明了从伏羲到朱子发展来的道统,一面阐明了韩国箕子以来的道统,从而树起了朝鲜学者们的标杆。这充实了被当作儒学根本的“修己治人”的理念,反映了在社会及政治现实中体现“道学”理念的方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