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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齋日記』를 통하여 16세기 이문건가의 경제적 운영의 변화와 수입원의 형태, 그리고 유배인의 신분으로서 괴산에 入鄕하는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문건가에서는 전국에 산재한 기존의 소유 전답과 노비를 유배 이후에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星州를 중심으로 경작지가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槐山을 중심으로 2~3두락의 소규모 전답을 지속적으로 買得하거나 확보해갔다. 노비의 경우는 유배 이후 奴 83口, 婢 50口 등 총 133口를 상회하였으며, 奴를 동원한 상업행위가 이루어졌다. 또한 4~5배의 이익을 보장하는 白布와 細紬의 防納, 그리고, 친인척과 동료들로부터의 ‘稱念’, 지방관의 救恤賑財 등의 경제적 지원을 통하여 일상 생활 전반에 충당할 수 있는 충분한의 물건들을 제공받았고 재산을 증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안정과 재산 확대를 통하여 이문건은 解配와 解配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현의 구체적인 한 예로서 이문건은 오랜동안 자신의 사회적 활동과 지위를 지원하였던 처가 안동김씨의 세거지인 괴산에의 入鄕을 결정하였다. 오랜 擇地과정을 거쳐서 가문의 再起와 번영을 위한 초석이라 할 수 있는 가옥과 塋山이 조성되었고, 이후 1561년에는 改粧增築이 이루어졌다. 묘역의 조성은 1558년 豆禾原(둑실)에 아들 의 葬地를 마련함으로써 본격화되었으며, 이후 直系孫들의 묘역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가옥을 마련한 이후 이문건 家는 지속적으로 괴산의 전답을 확대하였으며, 성주지역에서 官屯畓屬公畓을 貸用하거나 陳田開墾에 치중한 것과는 달리 괴산에는 소규모일지라도 買入과 증여가 확대의 주된 수단이었다. 租, 米, 麥(小麥), 木花(木花仁), 豆, 小豆, 生麻 등의 수확물은 星州에 輸納하였으며, 農事는 奴를 통하여 직접 지시하였다. 奴婢와 雇工人등을 경작에 동원하였는데, 농사만을 전담하는 奴婢의 예는 보이지 않았다. 槐山奴는 괴산의 전답을 경작하고 수시로 星州를 왕래하면서 안부 및 書信의 전달, 상전 敎示의 전달, 전답의 探索과 매매 대행, 물자의 운송, 主人家의 관혼상제에의 助役, 牛馬의 養育, 行次의 陪行등 각종의 雜事를 담당하였다. 또한 청어 貿易을 전담하였는데, 星州에서 靑魚를 구입하여 이를 槐山에서 판매하였다. 이상과 같이 槐山奴는 主人家의 생활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전가와 긴밀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시로 主人家의 각종 노동과 雜事에 使喚되는 존재였다.경제 기반의 확대와 노동력의 확보를 통하여 이문건 家에서는 경제적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의 장래와 後代를 위한 새로운 정착지로서의 槐山 入鄕과정에 지출하였다. 이는 宗法이 정착되는 시대적사회적 상황과 궤를 같이하여 가문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재투자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결국, 16세기 양반들이 철저한 경제관념 하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재산 증식에 집착하였던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을 이문건 家의 지출 양상을 통하여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주제어(Keyword):田畓, 買得,記上 奴婢 防納 稱念,屯田,婚姻,槐山, 入鄕, 擇地, 塋山의 조성, 槐山奴, 貿易


Managements of Econmony and Expenditure of the Lee Mun-Guns- With regard to their returning home to Geos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