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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국가 성립은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우방이었던 신라가 가야와 백제가 차례로 멸망하고 고구려마저 멸망하는 676년을 기점으로 하여 급속하게 진전된다. 야마토 조정에 있어서 야마토(大和=倭)라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개변하는 일과 한반도의 통일을 실현한 신라를 ‘번국’으로 위치 짓는 일은 동일한 문제였다. 『니혼쇼키』는 시종일관 중국의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 신라를 비롯한 삼한(三韓)을 번국시한다. 이것이 소위 진구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이다. 신라를 번국시하는 『니혼쇼키』의 사관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걸쳐서 성립한 고대율령제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요청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일본의 천하를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전승은 신라의 한반도 통일에 위기의식을 느낀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일본이 율령국가로서 탄생하는 텐무(天武), 지토(持統), 몬무(文武)로 이어지는 7세기 후반의 산물이다. 현실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야마토 조정이 고지키와 니혼쇼키를 통해서 대내적으로 천명하고자 한 것은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의 제국이 야마토조정의 천하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사서의 목적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에서 탈피해 중국과 대등한 일본의 ‘천하’를 대내적으로 천명하고자 했다는 것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를 위해 ‘신국(神国)일본’ 대 ‘번국(蕃国)신라’라는 새로운 경계설정과 자타인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화이사상에 의해 철저하게 국내와 국외를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어 경계를 설정한다. 동이(東夷)의 소제국(小帝国)이 되기를 갈구한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의 통치권의 범위를 케나이(化内)로 하고, 이를 다시 도히(都鄙:도읍과 변방)관념에 의해 국토를 키나이(畿内)와 키가이(畿外)로 양분한다. 그리고 천황의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지역을 케게(化外)로 구분한 다음, 이를 다시 인국(隣国:大唐)과 번국(蕃国:新羅)로 나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대일본의 자타인식은 동아시아의 화이사상에 자신을 투사시킨 변방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의 이러한 자타인식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서 왜왕은 여전히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동격이었으며, 야마토조정의 대외적 명칭은 야마토정권이 성립하기 전이나 성립한 이후나 변함없이 ‘야마토’이자 ‘왜’였기 때문이다.



日本における古代国家の形成は新羅の朝鮮半島の統一と連動しており、国内的には推古朝(593~628年)から大化の改新(645年)、壬申の亂(672年)を経て、大宝律令の制定(701年)に至るおよそ一世紀あまりの事件と連動している。大和朝廷において、「大和」という国号を「日本」に改変することと、朝鮮半島を統一した新羅を藩国視することとは、同質の問題であった。『日本書紀』は一貫して中国の華夷思想に基づき、新羅をはじめとした三韓を藩国視する。それが、いわゆる神功皇后の三韓征伐と任那日本府である。 しかし新羅を藩国視する『日本書紀』の史観は、7世紀後半から8世紀前半にかけて成立した古代律令国家のイデオロギーであった。そして任那日本府は、日本の「天下」を実践するために必要とした虚構にほかならなかった。現実の歴史と関係なく、大和朝廷が古事記と日本書紀を通して対内的に主張しようとしたのは、朝鮮半島の諸国が大和朝廷の天下の中に含まれているという認識である。その方法は異なるが、両書の目的が中国を中心とした天下から脱皮し、中国と対等な日本の天下を主張しようとしたという点においては、大同小異である。そのため、「神国日本」対「蕃国新羅」という境界設定と自他認識を必要としたのである。 東夷の小帝国になることを願望した日本は、天皇を頂点にして国家の統治権の範囲を「化内」とし、これを再び「都鄙」観念によって「畿内」と「畿外」とに両分する。さらに天皇の王化が及ばない地域を「化外」とし、これを再び隣国(=大唐)と蕃国(=新羅)として位置づける。しかしこのような古代日本の自他認識は、東アジアの華夷思想に自分を投射したイデオロギーにほかならなかった。なぜならば、このような日本の自他認識にもかかわらず、現実の東アジアの国際関係において、倭王は朝鮮半島の高句麗、百済、新羅と同格であり、大和朝廷の対外的名称は大和朝廷の成立以前もその以後も、倭であったからである。そして蕃国·夷狄を支配する帝国的秩序の構想·理念に対応した畿内制の実体化は、天皇権力が強化された天武朝に王権側の主導によってはじめて可能になった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