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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인도네시아의 동남부 술라웨시 주에 위치한 부톤 섬의 전통 봉건 엘리트들의 정치 권력과 위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부톤의 전통엘리트들은 크게 까오무와 왈라카라는 두 그룹으로 양분되었는데, 까오무는 행정을, 왈라카는 입법을 담당했다. 까오무는 술탄을 배출하는 최상의 귀족 그룹인 반면 왈라카는 백성들의 대표로, 입법과 술탄의 선출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술탄을 조종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해 내었다. 전통시대에 이 두 그룹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외부 세력의 영향으로 두 그룹 간 역할에도 변화가 일게 되었다. 우선 이 지역에 도래한 이슬람의 영향은 군주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전통적인 까오무-왈라카 그룹 관계에 변화를 초래했다. 이슬람이 가진 “군주는 알라의 그림자”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보다 권위를 얻게 된 까오무 세력은 왈라카의 권위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슬람식 헌법이 제정되어 왕국의 주요한 지위는 까오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왈라카들의 견제로 까오무들은 세력의 완전한 독점화는 이루지 못했다. 네덜란드 식민이 시작되자 왈라카들은 서구 교육의 수혜자가 된 반면 까오무는 평민이나 하급 귀족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신성함” 이 모독을 받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교육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 행정 시스템 속에서 관료로 약진한 것은 왈라카 계급이 되었다. 공화국의 출범 이후에도 교육을 받은 계층인 왈라카들은 지역의 행정에서 보다 권력을 장악했고, 이것은 까오무 세력의 불만을 초래했다. 196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를 휩쓴 반 공산 운동 속에서 부톤 엘리트들은 공산당의 협력자로 낙인찍혀 숙청을 당했는데, 이때 왈라카 엘리트들 보다 까오무 엘리트들의 희생 비율이 훨씬 높았다. 지역 주민들은 이 당시 까오무들이 왈라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하르토의 군부에게 왈라카가 공산당의 협력자라 은밀히 고발했다고 전하고 있다. 포스트-수하르토기에도 까오무와 왈라카 간의 신경전은 계속 되는 듯이 보인다. 지방자치의 물결을 타고 지역 엘리트들이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시작하자, 왈라카와 까오무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내세운 선거 전략을 마련했는데, 역시 왈라카들이 시장선거와 도지사 선거 등에서 까오무보다 선전하고 있다. 부톤 엘리트의 사례는 인도네시아에 존재하는 전통 신분제도가 공화국 들어 완전히 일소되지 않고 주민들의 인식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또한 전통 엘리트들이 공화국의 봉건주의 타파 정책 속에서도 연명하여 지방의 엘리트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