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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사의 출발점에서부터 ‘과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진보된 세계관의 핵심으로 인식되면서 ‘신지식’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 점에서 한국의 근대문학은 서구의 낭만주의가 거쳤던 과학과의 전면적인 충돌이나 불화는 거의 겪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과학=근대”의 등식은 초창기 문단의 형성기에 이미 성립하고 있었다. 근대적 신학문을 ‘과학(science)’, 즉 분과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예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통적인 용어인 ‘학문’과 ‘문학’이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새롭게 수입되기 시작한 ‘근대적 지식’은 전통적인 ‘학문’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면서 동시에 ‘문학’이라는 개념 속에도 틈입되었다. 특히, 시문학의 경우 서구의 낭만주의가 과학적, 기술적 합리성에 대하여 취했던 비판적이고 대항적인 태도나 그 의미가 식민지 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생략된 바, 1920년대 한국의 시사에서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적인 경향이 절대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주의’, ‘과학적 담론’과의 불화나 충돌은 의외로 나타나지 않는다. 1920년대 한국 시단은 낭만주의적 예술을 핵심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인생을 위한 예술’을 앞세우면서 ‘근대적인 시’의 실험과정을 거치고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서양의 ‘기술’과 예술적 ‘영혼’의 대립에 대한 자각은 아직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김기림의 ‘시와 시학의 과학화’는 이런 20년대적인 경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근대적인 ‘과학’의 체계를 바탕으로 ‘시와 시학’을 다시 정립시키기 위한 야심찬 기획이었다. 김기림의 ‘시론’은 ‘시의 과학화’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의 결과이며, 식민지 조선의 시를 ‘19세기적인 모든 경향’으로부터 탈피시키기 위한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시와 과학’은 일반적으로 그 친연성을 말하기 어렵다는 낭만주의 예술관을 받아들이면서도 과학에 대하여 부정적이지는 않았던 1920년대 시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다소 모순적인 것이었다면, 김기림은 이런 서로 상충되는 두 태도의 양립 속에서 식민지 근대화의 한계와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의 해소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김기림의 ‘시의 과학화’라는 명제는 한국의 1920년대적인 경향을 19세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런 후진성으로부터의 탈피를 기본 목표로 삼은 것이다. 1931년부터 시작된 김기림의 이런 노력은 1939년 ‘근대성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근대 이후의 시적 모색을 위한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서구적인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작업으로 ‘시적 근대화(과학화)’를 추구하다가 1939년 이후 ‘근대의 초극’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서구와 동양’을 동등한 위치에 설정한 김기림이 여전히 새로운 ‘세기’를 건너는 방법으로 ‘과학’을 내세운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과제에 대한 주체로서 ‘동양’을 새롭게 구상하면서도 그 핵심에 ‘과학’이라는 ‘서구적인 담론’을 위치시키고 있는 그의 사고는, ‘근대의 종언’ 속에서 ‘서양/동양’의 이분법의 철폐를 보면서, 동시에 ‘과학’이라는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통해 그 관계를 역전시키려는 의도까지 포함한 것이다. 시의 과학화라는 명제는 ‘근대성’을 ‘과학=기술’이라는 등식으로 풀어온 한국 초창기 근대문학의 풍토에서는 사실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그 문제를 본격화하여 논의가 된다. 임화, 김기림의 논쟁에서 이 문제는 ‘시와 기술’이라는 논점에 파묻혀 그 선명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시의 과학화라는 명제는 그 장르적 특성의 문제 때문에 ‘문학과 과학’의 상호 인접성이 강하게 존재했던 소설이나 여타의 분야와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임화와 김기림이 ‘기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도달한 지점은 시의 ‘미학주의’, ‘언어기교주의’를 넘어서 역사, 사회적인 가치의 추구이다. 이 점은 시의 과학화라는 개념의 범주를 보다 넓힌 것으로서, 1930년대 초반 주로 ‘기술’이라는 용어를 통해 ‘언어’의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시의 과학, 주지성’이 심리학, 사회학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역사적 계기를 그 내부로 포함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역사적 전환은 1935년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문명의 감수에서 비판’으로 시적 정신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한 김기림의 시론적 변화과정, 그리고 근대의 종언과 근대초극 과제의 등장으로 인한 시의 전면적 재구성 필요 등이 맞물림으로써 ‘시의 과학화’는 19세기적인 과거, 20세기적인 서구의 혼돈을 모두 청산하기 위한 중요한 명제가 된다. 이 점에서 시의 과학화는 모더니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기술’과 ‘제작으로서의 시’ 개념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시로부터 19세기적인 전통의 척결, 그리고 근대의 청산을 위해서, 언어적인 전문성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와 모랄, 전망을 찾는 핵심적인 방법과 태도로서 변화하게 되었다. 사실, 방법, 질서를 원칙으로 하는 근대의 청산과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김기림의 경우, ‘청산과 초극’ 양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문명의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파악되는 세계적 전환의 출발점에서 ‘시의 과학화’는 “시적 근대와 시적 탈근대”를 동시에 아우르는 명제이다.


Kim, Gi-lim's the theme, “science of poetry” has the goal which make korean poetry get out of the tendency of 19th century. He thank 1920's feature in Korean poetry is similar to the tendency of 19th poetry in Europe. This try of Kim, Gi-lim begins from 1931 and continue after 1939 when he declares the “end of modernity” to find new poetic view. It's very important that Kim, Gi-lim insist the ‘science’ as method to cross the “New era” even though he who pursuits the “modernization of poetry” to catch up with Western, think western and eastern are same level in the subject of transcendence of modernity. In advance he maps out the “Dong Yang(동양, 東洋, east)” as the subject in solution of problem, “transcendence of modernity”, he places the ‘western science discourse’ in the center of discourse on the “transcendence of modernity”. This thinking includes an intention that he tries take off a dichotomy of “Seo Yang(서양, 西洋, western)/Dong Yang(동양, 東洋, eastern)” and reverses this grade of rank with science method. This variation began from change of Kim, Gi-lim's poetic theory which turns the direction “from the reception of civil to the critique” meets the poetic needs to reconstruct of poetic view in the situation of ‘end/transcendence of modern’ after 1935. The theme, “science of poetry” is important thing which is able to clear off the feature of 19th, confusion of western in the 20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