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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仏教の思想の中核に、縁起の思想があ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ことである。今回、私は、唯識思想、とりわけ『成唯識論』の縁起説について紹介し、若干の問題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 唯識思想の縁起説といえば、阿頼耶識縁起説として、阿頼耶識、種子、熏習等のことが解明されるべきであろう。ただし、『成唯識論』では、『唯識三十頌』の第十八頌をめぐって、唯識の縁起観が集中的に説明されている。そこでは、十因(十五依処)・四緣・五果という仕方で、唯識の縁起観が明かされるのである。ここに、『倶舎論』の六因・四縁・五果をふまえつつ、しかも独自の縁起思想が展開されている。今回はこの箇所を取り上げ、主に四縁の因縁と所縁縁とに焦点をあてて、問題点を考えてみたい。 因縁においては、現行の諸法同士の間には、因果関係をみないという見方がはっきり打ち出されている。そうした因果関係は、現在の法の上の仮説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それは、現在実有・過未無体の立場からの、おのずからの帰結なのであろう。我々の意識上の世界の展開は、実は意識下における不可知の相続のからくりに基づくものなのである。 また、所縁縁に関しては、親所縁縁と疎所縁縁とがあることが示される。このとき、阿頼耶識の所縁には、有根身と器世間とに関して、自他は互いに疎所縁縁を持つことが主張されている。他者の身体を疎所縁縁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親所縁縁(影像相分)として他者の身体を有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ここには、自己の中に他者をも抱えているというあり方を見ることができる。 この自己観に立つことは、他者との共生を導くことになり、現今の地球社会の諸問題を解決していく一つの視点を提供してくれているであろう。



불교사상의 중심에 연기사상이 있는 것은 말할 것까지도 없다. 이번에 필자는 유식사상, 특히『성유식론』의 연기설에 대해 소개하고,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성유식론』에서는『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제18게송을 중심으로 유식의 연기관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성유식론』에서는 10因(十五依處)∙4緣∙5果의 방법으로 유식의 연기관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구사론(俱舍論)』의 6因∙4緣∙5果를 근거로 하면서 독자적인 연기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발쵀하여, 주로 4연 중의 인연(因緣)과 소연연(所緣緣)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유식삼십송』 제18송에 대해서: 우선 『유식삼십송』제18게송의 범문(梵文)은 다음과 같다. sarvabījaṃ hi vijñānaṃ pariṇāmas tathā tathā/ yāty anyonyavaśād yena vikalpaḥ sa sa jāyate//1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일체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있다. 그 전변(轉變)은 상호의 힘으로부터, 이와 같이 이와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갖가지의 분별(分別)이 생긴다.<18> 아뢰야식(阿賴耶識)<내지 종자>의 전변(轉變)에 의해 안식(眼識) 등의 많은 분별이 생기한다고 한다. 이 분별은 “허망분별(虛妄分別)은 삼계의 심왕(心王) ∙심소유법(心所有法)이다”(『변중변론』)에서 말하는 분별로, 모든 식활동(識活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이 경우의 ‘전변’은 스티라마티(Sthiramati, 安慧)의『유식삼십송석(唯識三十頌釋)』에 의하면 “이전의 단계와는 다른 것(purvavasthato anyathatvah)”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게송 중의 ‘更互의 力’(anyonyavasa)이란 스티라마티의『유식삼십송석』에 의하면 칠전식(七轉識)[안이비설신식과 의식, 말나식]과 아뢰야식(阿賴耶識) 사이에, 즉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스티라마티의『유식삼십송석』에서는 제18게송에 대해 이 정도의 해설뿐이다. 한편『성유식론』에서는 제18게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만약 오직 식(識)만이 있고 모든 외연(外緣)은 없다고 한다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갖가지의 분별이 생기하는가? 게송에서 말하기를,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에 의해 이와 같이 이와 같이 전변(轉變)한다. 전전력(展轉力)에 말미암아 갖가지(彼彼)의 분별이 생기한다.” (若唯有識都無外緣. 由何而生種種分別. 頌曰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新導本 成唯識論』권7, 27항. 이하 7 ∙ 27로 略記) 『성유식론』에서는 ‘anyonyavasad’를 ‘yati’가 아니고, ‘jayati’에 걸어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 읽는 방법에 따라 연기의 포괄적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제18게송에 대해『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먼저 제1구와 제2구 해설에서, 일체종식에 대해 식이 아니라 종자라고 하였으며, 전식(轉識)에 대해서는 ‘전역변숙(轉易變熟)’, 즉 종자가 상속하는 중에 다음의 찰나에 현행(現行)하는 것과 같은 상태로 익는 것이라고 하였다.『유식삼십송』제1게송과 제2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식 자체(識自體)가 전(轉)하여 이분(二分)으로 사현(似現)한다”는 것의 전변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계속해서 제3구와 제4구의 해설에서, 전전력이란 현행한 8가지 식의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등이 무엇인가 서로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스티라마티의『유식삼십송석』에서 주석한 ‘종자생현행 ∙ 현행훈종자’의 관계와도 다른 해석이다. 이처럼 전변한 종자의 힘과 현행 사이에 서로 도와주는 힘에 의해 8가지 식의 활동(彼彼의 分別)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외계(外界)가 존재하지 않아도, 감각 ∙ 지각 등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성유식론』에서는 종자의 힘, 그리고 현행의 서로 도와주는 힘과 관련해서 4緣(hetu-pratyaya因緣, samanantara-pratyaya等無間緣, alambana-pratyaya所緣緣, adhipati-pratyaya增上緣)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상당부분의 해설을 생략한 스티라마티의 주석과는 크게 다르다.『성유식론』에서는 연기의 모습(相狀)에 대해서 아비다르마의 입장을 근거로 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제18게송의 일체종자에 대해『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이 등류<과>, 이숙<과>, 사용<과>, 증상<과>를 생기하는 까닭에 일체종자라고 이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자는 5과 중에서 이계과(離繋果)를 제외한 4과를 생기시킨다고 한다. 5과는『구사론』에서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이숙과(異熟果, vipaka-phala)・등류과(等流果, nisyanda-phala)・이계과(離繋果, visamyoga-phala)・사용과(士用果, purusakara-phala)・증상과(増上果, adhipati-phala)를 말한다.『성유식론』에서도 4緣에 대해서 권8에서 설명하고 있다.(8・6) 종자는 이 중에서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종자를 생기하지 않는> 이계과를 제외하고 4과를 생기시킨다고 하였다. 종자에는 일반적으로 명언종자(名言鍾子)와 업종자(業種子)가 있으며, 이것은 하나에 두 가지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명언종자는 8가지 식의 상분과 견분 등의 직접적인 종자로,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의 법칙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한편 업종자는 명언종자의 선성(善性) 또는 악성(惡性)이 내세에 태어남을 받는 장소를 결정하여 가는 작용에 이름 붙인 것으로, 선인낙과(善因樂果)・선인고과(惡因苦果, 異熟)의 법칙에 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자가 등류과와 이숙과를 생기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증상과를 생기시키는 것은 종자가 증상연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증상연은 지극히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사용과(士用果)이다. 종자의 사용과에 대해서는 특히 <모든 식과 함께 작용하는 변행 심소(心所) 중의 하나인> 작의(作意) 심소의 종자와 관련하여 설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확실히 작의 심소는 “능히 심[심왕]을 경각(警覺)시키는 것을 본성[性]으로 하고, 소연의 경[인식대상]에로 심을 이끄는 것을 작용[業]으로 한다. 이것이 응당 일으켜야 하는 마음의 종자를 경각시키고, 이끌어 대상에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성유식론』)라고 하였다. 이 중에 ‘응당 일으켜야 하는 마음의 종자를 경각’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것인가? 실로 이것은 작의 심소의 종자가 다음 찰나에 일으켜야 할 심법의 종자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작자(作者)가 작구(作具, 緣)을 빌려’ 심법(心法)을 작동시키는 것이 있다. 즉 사용과를 생기시키는 것이 확인된다. 다만 사용과는『구사론(俱舍論)』에서 구유인(俱有因) 및 상응인(相應因)의 과(果)로 간주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공간적(동시적) 인과관계에서의 과(果)이다. 그렇다면 종자가 동시에 과(果)를 생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에 대해서도 작의 심소의 종자가 동시에 있는 또 다른 다음 찰나에 일으켜야 할 심법의 종자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의 인과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동시의 사용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종자는 이계과를 제외한 4과를 생기하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6因 ∙ 4緣 ∙ 5果의 연기설을 설하였다. 반면『성유식론』은 4연 ∙ 5과를 받아들였지만, 6인은 채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十因(十五依處)을 기술하고 있다. 다만 십인은 4연을 자세하게 설하는 것이지만,『구사론』의 6인과는 상당히 다르다. 또한 앞의 종자는 4과를 생기한다고 하였지만, 유식에서는 모든 경우에 종자가 인(因)이 된다고 보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숙과를 생기시키는 것은『구사론』에서는 이숙인이지만, 유식에서는 업종자라고 한다. 업종자는 이숙과가 될 명언종자의 현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식은 인(因)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4연중에서도 인연이 이른바 因[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4연중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성유식론』에 나타난 인(因)의 견해를 살펴보겠다.『성유식론』에서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종자와 현행을 연(緣)하여 분별을 일으킨다면, 이것의 연(緣)과 生의 相[양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연(緣)에는 우선 4가지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중에 인연의 설명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연(因緣)이다. 이른바 유위법(有爲法)이 친히(親) 자기의 결과(自果)를 변별(辨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체[體]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자이고, 다른 하나는 현행이다. 종자란 本識[아뢰야식] 중의 선(善)∙염(染)∙무기(無記)와, 여러 세계(諸界)와 지위(地) 등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을 말한다. 능히 다음[차후]의 자기 부류의 공능[自類功能]을 이끌며, 동시에 자기 부류의 현행과(現行果)를 일으킨다. 이것[종자]은 저것[자기 부류의 공능과 자기 부류의 현행과]에 대해서만 인연의 성품[性]이 된다. 현행이란 칠전식과 그것의 상응과 변현된 상분과 견분, 성품[性]과 세계[界]와 지위[地] 등을 이른다. 불과(佛果)의 선(善)과 미약한 무기(無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본식(本識)에 훈습(薰習)되어 자기 부류의 종자[自類種]를 생기시킨다. 이것[能熏現行]은 오직 이것[所熏種子]에 상대해서만 인연의 본성이 된다.”(一因緣. 謂有爲法親辦自果.此體有二. 一種子. 二現行. 種子者謂本識中善染無記諸界地等功能差別. 能引次後自類功能. 及起同時自類現果. 此唯望彼是因緣性. 現行者謂七轉識及彼相應所變相見性界地等. 除佛果善極劣無記. 餘熏本識生自類種.此唯望彼是因緣性. 7 ∙29) 이처럼 인연은 종자생현행 및 종자생종자의 (앞의) 종자 및 현행훈종자의 현행만이 인연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현행법(現行法)과 법(法)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인(因)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식 연기관의 핵심과 관련되는 것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인연을 설명한 후에『성유식론』에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행의 동류(同類)가 전전(展轉)하여 서로 상대해도 모두 인연이 아니다. 자기 종자[自種]로부터 생기하는 까닭이다. 일체의 이류(異類)를 전전하여 서로 상대하여도 또한 인연이 아니다. 친히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자가 설하기를, 이류와 동류의 현행을 전전해서 서로 상대해서 인연으로 삼는다는 것은 가설(假說) 혹은 수전문(隨轉門)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 수 있다. 어떤 자가 오직 종자만이 인연의 성품이라고 설한 것은, 현저하게 뛰어난 것에 의지하여 말한 것이지, 도리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전식(轉識)[현기하는 6식과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전전하여 서로 상대해서 인연이 된다고 설했기 때문이다.”(現行同類展轉相望皆非因緣. 自種生故. 一切異類展轉相望亦非因緣. 不親生故. 有說異類同類現行展轉相望爲因緣者. 應知假說. 或隨轉門. 有唯說種是因緣性. 彼依顯勝. 非盡理說. 聖說轉識與阿賴耶展轉相望爲因緣故. 7∙29-30) 이처럼 유식에서는 종자와 현행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도 현행(現行)하는 제법(諸法)의 자기 부류[自類]∙다른 부류[他類] 사이의 인과관계 내지 연기는 가설(假說)이라고 하여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종자의 본유(本有)∙신훈(新熏)의 논의 중에 논하고 있다.(2∙18-19참조) 그렇다면 종자생종자 사이에는 인과(因果)를 인정하는가? 확실하게 인연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과(因果)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인과관계를 어떤 의미로 성립하는지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관련하는 것이 아뢰야식의 상속(相續)에 있어서 인과(因果)의 문제이다. 이것에 대해『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응당 대승의 연기의 正理(바른 도리)를 믿어야 한다. 이 정리는 심묘해서 언어를 떠난 것이다. 인(因)∙과(果) 등의 말은 모두 임시적[假]으로 시설(施設)한 것이다. 현재의 법이 나중의 작용을 이끄는 것을 관찰하여 임시적[假]으로 미래[當]의 과(果)를 세우고, 이에 대해서 현재의 원인을 설한다. 현재의 법이 이전에 응수하는 相[양상]이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 임시적으로[假] 과거[曾]의 원인을 세우고, 그것에 대하여 현재의 결과를 설한다. 가(假)라는 것은 현재의 식(識)이 그것[과거와 미래]에 비슷한 相[양상]으로 현현(顯現)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인[因]과 결과[果]는 논리의 취지[理趣]가 분명하다. 二邊[常과 斷의 양극단]을 멀리하여 중도에 계회(契會)한다. 모든 지혜가 있는 자는 응당 따라서 배워야 한다.”(應信大乘緣起正理. 謂此正理深妙離言因果等言皆假施設. 觀現在法有引後用. 假立當果對說現因. 觀現在法有酬前相. 假立曾因對說現果. 假謂現識似彼相現. 如是因果理趣顯然. 遠離二邊契會中道. 諸有智者應順修學. 3∙10) 이와 같이『성유식론』은 현재의 법에 대해 과거의 법이나 미래의 법을 원인과 결과로 상정하고, 그곳으로부터 도리어 현재의 법이 결과와 원인으로서 세워져 있을 뿐이며, 진정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종자생종자의 지평(地平)에서도 비연속(非連續)의 연속(連續)으로써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그 사정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이것은 현재만이 실유(實有)이고,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명확한 인식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종자생종자에서 인과관계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가설(假說)이라고 하는 것이 유식의 궁극적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연에 대해서 기술해야 하지만, 시간관계상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증상연(增上緣)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소연연(所緣緣)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성유식론』에서는 소연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셋째는 소연연이다. <소연연이란> 유법(有法)이 자기의 모습[相]을 띠고 있는 심[心王]과 혹은 상응하는 <법>[心所]의 사려된 것[所慮]과 의탁된 것[所託]을 말한다. 이것의 자체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친(親)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疎)이다. 만약 능연(能緣)과 자체[體]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견분(見分) 등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친소연연(親所緣緣)이라고 마땅히 알 수 있다. 만약 능연(能緣)과 자체가 서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본질로 삼아 능히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을 생기시킨다면, 그것은 소소연연(疎所緣緣)임을 마땅히 알 수 있다. 친소연연은 능연에 모두 있다.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을 떠나서는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소연연은 능연에 있기도 한다. 외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을 떠나서 또한 생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三所緣緣. 謂若有法是帶己相心或相應所慮所託. 此體有二. 一親二疏. 若與能緣體不相離. 是見分等內所慮託. 應知彼是親所緣緣. 若與能緣體雖相離. 爲質能起內所慮託. 應知彼是疏所緣緣. 親所緣緣能緣皆有. 離內所慮託必不生故. 疏所緣緣能緣或有. 離外所慮託亦得生故. 3∙32-33) 소연의 견해에 대해서『구사론』과 유식 사이에는, 행상(行相)을 견분으로 볼 것인가, 상분으로 볼 것인가? 혹은 상분으로 소연을 보는가, 보지 않는가? 라고 한 식구조(識構造)의 이해에 관한 차이가 나타난다. 설일체유부에서도 식에 상분에 해당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상분을 행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소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결과 식 외부의 대상이 소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식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식 내부의 상분을 친소연연이라고 하고, 외부의 대상을 소소연연이라고 하여, 오히려 식 내부의 소연연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 식에는 반드시 상분이 있다는 증명(식의 四分說, 九難義의 第一, 唯識所難의 理證)과 관계한다. 동시에 인식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타자심(他者心)의 인식의 존재방식에 관한 설명이 참고가 될 것이다.『성유식론』의 일체 유식을 둘러 싼 구난의(九難義)의 8번째인 외취타심난(外取他心難)에 대해 설하는 중에, 타심(他心)의 인식의 존재방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외부의 색[물질]은 실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부 식(內識)의 대상[境]이 아니다. <그렇지만> 타심(他心)은 실로 존재하는데, 어째서 자신의 소연[대상]이 아닌가? 누군가 타심은 자기 식[自識]의 대상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단지 그것[他心]은 친소연이 아니라고 설한 것뿐이다. 식(識)이 생기할 때는 진실한 작용은 없다. 손 등이 친히[직접] 외물(外物)을 잡거나, 태양 등이 빛을 펼쳐 직접 외부대상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단지 거울 등과 같이 외경[외부대상]에 사현(似現)하는 것을, 타심을 요별(了別)한다고 이름한다. 친히 요별하는 것이 아니다. 친히 요별된다는 것은 자신의 所變[전변]이다. 그래서 경전에 말하기를, ‘小法[작은 법]이라도 능히 나머지 법[心外法]을 취하는 것은 없다. 다만 식(識)이 생기할 때, 그것과 비슷한 모습[似相]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을, 그것[他心]의 사물을 취한다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타심을 반연(攀緣)하는 것과 같이 색 등도 또한 이와 같다.”(外色實無可非內識境. 他心實有寧非自所緣. 誰說他心非自識境. 但不說彼是親所緣. 謂識生時無實作用. 非如手等親執外物日等舒光親照外境. 但如鏡等似外境現名了他心. 非親能了. 親所了者謂自所變. 故契經言. 無有少法能取餘法. 但識生時似彼相現名取彼物. 如緣他心色等亦爾. 7∙26) 타심의 인식은 외부의 타인심(他人心)의 (표정)을 소소연연이라고 하며, 자기의 식에 상분을 현현하여 그것을 지각할 때, 타심의 인식은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타심통(他心通)과 같이 신통력에서의 인식에서는 타자심을 직접 소소연연한다고 한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기본적으로 식 내부의 상분이 소연[親]이다. 그러나 그것을 초래하는 외부의 대상이 있을 경우, 그것도 소연[疎]라고 부른다. 이 때 별도로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영상과 본질은 자기 내부의 8식만이라고 말하지만, 친소연연과 소소연연은 그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여튼 유식의 교리에서는 각각의 식에 친소연연은 반드시 존재하지만, 반면 소소연연은 존재한다고 한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선 전오식(前五識) 내지 말나식(末那識)에서의 소소연연의 유무(有無)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전오식은 아뢰야식의 상분(相分)인 기세간 등을 소소연연으로 하고, 상분에 색(色), 성(聲), 향(香) 등을 떠올려 친소연연이라고 한다.(前五心品未轉依位麤鈍劣故必仗外質故亦定有疏所緣緣. 已轉依位此非定有緣過未等無外質故.) 제6의식은, 소소연연의 유무(有無)는 일정하지 않다(不定). 토끼 뿔이나 거북이의 털 등의 인식에 소소연연은 없다.(第六心品行相猛利. 於一切位能自在轉. 所仗外質或有或無. 疏所緣緣有無不定.) 제7말나식은,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소소연연이라고 하고, 상분에 나의 영상을 떠올려 이것을 친소연연이라고 한다.(第七心品未轉依位是俱生故必仗外質. 故亦定有疏所緣緣. 已轉依位此非定有. 緣眞如等無外質故. 7∙33-34참조) 그런데 아뢰야식은 상분에 유근신(有根身)과 기세간과 종자를 가졌다고 하지만,(『유가사지론』권51, 대정장 30권 580항 상 참조) 이것들에 대해, 소소연연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성유식론』에서는 전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제8식의 심품(心品)에 관해서 <어떤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친소연연만이 있다. 업(業)과 因[종자]의 힘에 따라 자연적[任運]으로 변[變現]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소연연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소소연연도 있다. 반드시 타인의 변현에 의지하여[杖] 본질로써 스스로 변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입장 모두 논리에 합당하지 않다. 자타(自他)의 신체와 국토(기세간)를 서로 수용할 수 있고, 타인의 所變[전변]을 자기의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자신의 종자를 타인에게 수용하는 도리는 없으며, 타인이 이것을 변현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은 종자가 모두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당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 <심>품의 소소연연은 일체의 단계에서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다.(第八心品有義唯有親所緣緣. 隨業因力任運變故. 有義亦定有疏所緣緣. 要仗他變質自方變故. 有義二說俱不應理. 自他身土可互受用. 他所變者爲自質故. 自種於他無受用理. 他變爲此不應理故. 非諸有情種皆等故. 應說此品疏所緣緣一切位中有無不定. 7∙33) 앞의 인용문에는 3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아뢰야식은 소소연연을 못 가진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아뢰야식의 상분(친소연연)에는 반드시 소소연연이 있다는 입장이다.『성유식론』에서는 이 2가지 입장을 배척하고, 제3의 입장을 세운다. 이것[제3의 입장]은, 종자에는 소소연연은 없지만, 신체[有根身]와 국토[器世間]에는 소소연연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용문 중의> ‘자타(自他)의 신체와 국토[器世間]를 서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에 따르면, 아뢰야식은 타인의 신체를 소소연연할 뿐 만 아니라, 친소연연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전오식의 근(根)이 되는 기능은 자기의 유근신뿐이다. 타인의 신체를 소소연연하기도 하고 친소연연하기도 한다는 것은 근의 기능까지 미치지 않는다. 단지 인간으로써 자기의 유근신의 근(根)의 기능 그 자체가, 타인의 신체의 근(根)의 기능과는 무언가 공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술기(述記)』권3본에서 종자는 공상(共相)과 불공상(不共相)의 2종류가 있다고 하였으며,『유가사지론』권66에서는, 이 공상과 불공상을 다시 공(共)과 불공(不共)으로 나누고 있다. 이것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상(共相) 공중공(共中共) 산하대지 등(山河大地等) 공중불공(共中不共) 전택의복 등(田宅衣服等) 불공상(不共相) 불공중공(不共中共) 자기부진근(自己扶塵根) 불공중불공(不共中不共) 자기승의근(自己勝義根) (회본2∙131 참조) 후카우라(深浦)는 “자기의 부진근(扶塵根) 은 내경(內境)으로써 제8을 집수(執受)하거나, 게다가 타신(他身) 또는 이것을(非執受의 것으로) 변현하여 수용(受用)할 수 있다면 불공중공(不共中共)이라고 한다. 자기의 승의근(自己勝義根)은 같은 제8을 집수한 위에 단지 자기 몸 하나의 수용에 한정되어, 타신을 수용할 수 없다면, 불공중불공(不共中不共)이라고 한다.”라고 해설하고 있다.(深浦,『唯識學硏究』434항) 이처럼 물질적 신체(扶塵根)는 타인에게도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공상종자 ∙ 불공상종자는, 그것이 현행하기 위해서는 선악 업력(善惡業力)의 도움(증상연)이 없으면 안 된다. 이 때 공상종자를 돕는 업종자는 공업(共業)의 종자이고, 불공상종자를 돕는 업종자는 불공업(不共業)의 종자이다. 공업이란 모든 유정의 소작(所作)이 자연히 공통유동(共通類同)이 되는 것이고, 불공업이란 피차각별(彼此各別)하여 공통유동(共通類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深浦, 위의 책 436항) 참고로 인인유식(人人唯識)이라고 하여, 각인(各人)의 아뢰야식의 所變[所現]은 별도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同時)∙동소(同所)에 무애섭입(無礙涉入)하고, 마치 하나[단일]한 것처럼 존재하여, 각자에게 똑같이 수용된다. 이것에 대해『성유식론』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의 소변(所變)이 각자 다르지만, 모습[양상]이 서로 비슷하며 처소(處所)가 다른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많은 등불의 빛이 각각에 두루 <비치>듯이 하나의 <등불과> 닮는 것과 같다.”(雖諸有情所變各別. 而相相似處所無異. 如衆燈明各遍似一. 2∙31) 라고 기술하고 있다. 타인의 신체[부진근]을 수용한다는 것은 타인의 신체를 본다든지 만진다든지 하는 것으로, 그것은 가까운 사람에게 한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세간은, 보고 듣는 범위가 한정된다고 하더라도, 전체가 아뢰야식의 상분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타인의 신체는 아뢰야식의 상분으로 현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그곳에 가면 타인과 만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아뢰야식 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타인의 신체를 소소연연으로써, 그 타인의 신체를 자기 아뢰야식의 상분에 현현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 때 자기는 모든 타인의 신체를 자기 속에 포섭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이 위치하고 있는 모든 국토, 모든 타인이 존재하는 기세간도 자기 안에 구족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 대략적으로 기술하였지만,『성유식론』의 연기관을 4연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성유식론』에 의하면, 현행의 제법 사이에 연기(因果)의 관계는 없다고 하였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설(假說)이라고 하였다. 이것은『구사론』의 연기설과는 전혀 다른 견해이다. 그것은 현재실유(現在實有)∙과미무체(過未無體)의 입장에서의 대략적인 귀결이다. 우리들의 의식 상에서의 세계 전개는, 실로 의식 아래에서의 불가지한 상속의 구조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연에 관해서도,『성유식론』의 견해는 다소『구사론』의 견해와 다르다. 특히 소연연에 관해서는, 식(識) 구조의 이해나 인식이 성립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구사론』의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소연(특히 소소연연의 존재방식)의 설명은 밀교에서 만다라는 자심(自心)에 있다는 것(空海『秘密曼茶羅十住心論』第10秘密莊嚴心의 설명 등을 참조)을, 이미 일정한 방식으로써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자타의 신체와 국토(기세간)를 서로 수용할 수 있다’라는 구(句)에서, 자기는 신체와 환경의 전체인 동시에, 타인이 가진 하나의 신체와 환경의 전체 모두를 자기 속에 가져, 한량없이 소중한 자기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타는 서로 관계하면서도 별도인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릴 때, 자기존재에 대한 이해는 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생(共生)의 실현에 깊게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덧붙여 공생은 결코 개개인의 단순한 융합 내지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며, 대립의 공존일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오히려 약자나 피차별자와의 새로운 관계의 구축에 대한 바람이어야 한다. 이 사고방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당연히 응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자연도 또한 너(2인칭)로서 대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 존중, 협력, 교류, 원조 등은 동시대에서도 실현해가는 것이 긴급한 과제인 동시에,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보장∙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래에도 실현해 갈 것을 전심(專心)으로 추구해 가야 할 것이다. 이 공생의 개념을 근거로 삼아, 필자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 및 인간과 인간의 공생을 동시에 통합적으로 실현하는 철학을 추구하고 싶다. 이것에 대해『성유식론』의 소연연의 설명은, 공해(空海)의 만다라 사상과 함께, 커다란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