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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고는 기원전 2세기 평양 일대에 조성된 고분을 검토하여 고고학적 관점에서 위만조선의 문화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위만조선이 토착계 주민과 燕·齊·趙의 중국계 이주민으로 구성된 다종족(Multi-Ethnic Groups) 국가였다고 파악하였다. 평양 일대는 위만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등 남북한 학계가 모두 위만조선의 강역으로 보는 최소한의 합의지역이다. 본문에서는 문헌에 고조선이 명확히 등장하는 시기, 즉 연과 직간접적으로 충돌하는 기원전 4세기 이후 서북한 지역의 고고학적 배경을 무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기원전 2세기 평양 일대에 조성된 무덤을 토광직장묘,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북한 학계의 나무곽무덤)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이들 무덤의 부장품을 일별하여 평양 일대 거주민의 실체와 그들이 지닌 문화의 일면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토착의 돌무덤 전통이 사라지고 토광묘계 무덤이 새롭게 주 묘제로 채택되었으나 부장품은 세형동검 관계 유물 위주에 철기가 추가되는 양상을 확인하였다. 무기류에서는 여전히 청동기를 의존하면서 철제 利器類를 겸용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철기의 사용이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부장품에서철기의 존재, 세문경의 부재, 세형동검과 세형동과 등 무기적 성격이 강한 위세품의 부장을 통해 위만조선이 중국 戰國과 한의 영향을 받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리제 구슬류 등 장신구의 다량 부장 양상은 위만조선의 교역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기가 내려오면서 철기의 부장이 일반화된다는 점 외에, 이러한 고고학적 양상은 기원전 1세기까지 계속되는데, 본고는 이를 위만조선인 가운데 일부는 국가가 멸망한 이후에도 현지에 그대로 남아 한 군현의 정치 엘리트로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지고 고유의 토착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로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