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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1907년 무렵에는 국채보상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는 ‘근대문명의충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대한제국이 몰락하는 국가적 위기 국면이었다. 이때 민족운동의 흐름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단체인 상업회의소를만든 상인들은 후진 양성을 위한 학교인 상업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일제강점기에 들어가자 그들은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 내의 공공사업, 특히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지원했다. 양성관과 한상봉은 상업회의소 리더로서 상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그들과 같이 행동을 했던 인물 중에는 홍민섭과 차유순 등이 있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그러한 변화에 대응했던 상인들은 19세기 후반 조선왕조 내에서 성장해서, 20세기 전반기 식민지 시기까지 활동했던, 이른바 ‘전통에서 근대로의 전환기’를 체험한 수원지역 유지 1세대였고, 또한그들은 대지주였다. 근대식 교육을 받은 홍민섭의 아들 홍사훈과 차유순의 아들 차준담 역시 수원 경제계의 리더가 되었고, 그들 역시 지역의 공공사업인 학교설립및 운영 등 교육분야에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를 했다. 특히 차준담보다15살 많은 홍사훈은 자신이 졸업한 상업강습소를 화성학원으로 발전시켰고, 또 사회주의 경향의 인물들과도 교류했던 수원지역 청년리더였다. 홍사훈은 양성관의 아들 양규룡과도 회사 운영을 같이 했다. 차준담은 홍사훈 여동생과 결혼했고, 차준담의 딸들은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을 설립한 김성수 ․ 김연수 가에 시집을 갔다. 그들은 기업운영, 지역사업 그리고혼인관계 등을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 유지 2세대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한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수원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차준담은 홍사훈의 조카 홍길선과 함께 해방이후 수원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양, 홍, 차 등 三富子는 20세기 초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 이후까지 ‘상인․지주층’의 입장에서 수원 지역의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1904年に日露戰爭が勃發して京釜線鐵道が開通し、1907年ごろには國債報償運動が全國的に展開された。このような時期に迎えた「近代の衝擊」は、大韓帝國を危機の局面に追いやった。このような狀況において民族運動の擴散に影響を受けた商人たちは商業會議所を結成し、さらに後進の養成のために商業講習所を設立した。1910年以後、彼らは日本人との關係を積極的に形成した。また、彼らは學校の設立や財政支援といった地域內の公共事業に積極的に參加しもした。梁聖寬と韓相鳳は商業會議所のリ-ダ-として商人たちの呼應を引き出し、洪敏燮と車裕舜もその同僚であった。個人ではなく集團として「近代の衝擊」に對應した商人たちは、19世紀後半に朝鮮王朝內で成長し、植民地統治が幕を閉じる20世紀中ごろまで活躍した。また、彼らは大地主でもあった。彼らはいわゆる「傳統から近代への轉換期」を體驗した水原地域の有志第一世代であった。近代的敎育を受けた洪敏燮の息子洪思勛と車裕舜の息子車濬潭も水原經濟界のリ-ダ-となり、彼らもまた地域の學校の財政と運營を支援した。車濬潭より15歲年上の洪思勛は、自らが卒業した商業講習所を華城學院に發展させ、社會主義傾向の人物たちとも交流した水原地域の靑年リ-ダ-であった。洪思勛は梁聖寬の息子梁奎龍とも會社經營をともにした。車濬潭は洪思勛の妹と結婚した。彼らは企業運營、地域事業、そして婚姻關係などによって密接に結びついていた。これら有志第二世代も日帝の侵略戰爭に同調する活動を行った。彼らは解放以後にも水原の主要人物となった。車濬潭は洪思勛の甥洪吉善とともに、解放後に水原地域で國議員選擧に出馬した。梁․ 洪․ 車という富裕な三家系は、大韓帝國、植民地朝鮮、大韓民國と續く20世紀初めから中ごろにかけて、「商人․ 地主層」の立場から水原地域の近代化を主導した勢力であ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