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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상․이희조 부자를 제향한 학산서원은 1708년(숙종 34) 건립되어 19세기 후반에 철폐되기까지 인천의 유일한 서원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회사상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첫째, 그간 이단상의 생애와 학문은 주로 18세기 낙론 학맥의 前史로서 다루어지는 가운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노론의 주류와 구별되는 독창성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단상의 대체적인 정치사상적 행로는 반청사조에 기반을 둔 서인-노론의 주류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또한 숙종~경종 연간 아들 이희조가 견지했던 태도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결국 소론이 주도한 신임사화 때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그동안 학산서원 건립을 전후한 시기 인천지역 학계의 동향은 주로 낙론의 확산 과정으로 이해되었으며, 학산서원 역시 낙론계 서원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사족의 발달 및 그에 기반한 사상적 토대가 굳건하지 못했던 인천에서 호락논쟁처럼 대단히 사변적인 논쟁이 과연 뿌리내릴 수 있었으며, ‘낙론계 학인’이라는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즉 낙론학맥의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학산서원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기존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단상․이희조 부자가 제향된 학산서원의 건립과 운영의 기본 성격은 효종 연간 북벌론 및 여기에서 발원하는 서인-노론 이데올로기의 흐름 속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祭享李端相、李喜朝父子的鶴山書院建立于1708年(肅宗34),直至19世紀後半撤廢之時,其作爲仁川唯一的書院在社會思想史上的意義非同一般。 首先,學界上一般將李端相的生平及學問視作18世紀洛論學脈的前史,主要強調了他不同於宋時烈等西人-老論主流的獨特性。但是,李端相的政治思想路線基本上建立在西人-老論的主流思惟之上。在肅宗~景宗年間,其子李喜朝所堅持的態度也沒有背離西人-老論的主流,以至於他在少論發起的辛壬士禍中犧牲了生命。 其次,鶴山書院建立時期的仁川地區學風被公認爲體現了洛論的推廣期,因此鶴山書院被劃定爲洛論界書院。可是,在士族發展和其思想基礎並不牢固的仁川,像湖洛論爭這樣極盡思辨的論爭是否真的能夠落地生根,并形成洛論界的學者群體,還是值得懷疑的。即,立足于洛論學脈的推廣來爲鶴山書院定性的基本觀點需要重新推敲。 總而言之,祭享李端相、李喜朝父子的鶴山書院的建立和運作,應該置於孝宗年間北伐論和由此而生的西人-老論的意識形態中,重新來研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