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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集安市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문』은 비문의 마지막에 기록된 수묘인연호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고구려의 수묘제도와 지배영역의 확대를 전해주는 귀중한 1차 사료로서 이용되어 왔다.이러한 고구려 수묘제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다음 세 가지 점을 중심으로 국연과 간연이 성격과 입역방식을 살펴보았다.첫째, 징발된 수묘인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하는 문제인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왕릉의 수묘를 담당하는 고구려 중앙관서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물론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도 있지만, 중국과 일본 등 왕릉이 있는 국가에는 반드시 수묘를 담당하는 諸陵司와 같은 관서가 있었다. 따라서 기록되지 않은 부분도 포함해서 하나의 '제도'로서 비문의 기록을 고찰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둘째, "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라는 기록의 해석문제인데, 이 구절은 이미 광개토왕릉이 완성되고 비석도 세워져 수묘를 위한 준비가 끝난 시점에서도 阿旦城과 雜珍城의 守墓戶가 아직 구체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아단성과 잡진성의 수묘호는 적어도 능비가 세워진 414년 당시에는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또 아단성과 잡진성의 수묘호 만이 예외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들이 포함된 범주 전체가 414年에는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범주는 신래한예와 간연인데 신래한예는 광개토왕의 '敎言'에 따라 처음부터 수묘호로 지정된 존재였으므로 이들이 수묘의 시작 시점에서 수묘역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간연이 능비가 세워진 시점에선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또 "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 看烟三百都合三百 家"라는 기록의 해석도 문제인데, 지금까지는 수묘인 중에서 국연이 30家, 간연이 300家라는 1:10의 비율에 주목하고 국연과 간연 모두 구민과 신래한예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연 1가와 간연 10가가 하나의 노동조를 이루어 수묘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대표적인데, 구민 수묘호 110가가 징발된 이유는 신래한예 수묘호가 수묘에 관한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연과 간연을 막론하고 신래한예만으로 노동조가 구성될 수 있는 조합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셋째, 비교적 수묘제에 관한 史料가 잘 남아있는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다. 물론 사료의 연대가 약 400년 이상 차이가 나서 직접 이용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일본에는 비문이 전하는 고구려 수묘제도와 매우 비슷한 기록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특히 "別記云, 常陵守及墓守, 幷八十四戶, 倭國 七戶, 川內國 七戶, 津國五戶, 山代國五戶, 免調 也, 公計帳文莫納, 別爲計帳也. 借陵守及墓守, 幷百五十戶, 京二十五戶, 倭國五十八戶, 川內國五十七戶, 山代國三戶, 伊勢國三戶, 紀伊國三戶, 右件戶納公計帳文, 而記借陵守也(『令集解』 卷第4, 治部省 諸陵司條의 古記에 引用된 別記)"라는 기록은 수묘인을 '常陵守及墓守'와 '借陵守及墓守'로 구분하고 각 지역별로 정원을 규정하고 있어 비문의 기록방식과 사실상 같다고 할 수 있다.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한 결과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국연은 능비 완성 당시에 광개토왕릉이 있는 國岡上으로 사민되어 수묘역에 종사하던 烟戶이고, 간연은 국연 중에서 결원이 있을 경우 대체하여 수묘하도록 지정된 예비 수묘호일 가능성이 높다.이와 같이 보면 광개토왕릉의 수묘호인 330가 중에서 직접 수묘역에 투입되는 숫자는 구민 국연 10가와 신래한예 국연 20가를 합쳐 30가에 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