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勿吉은 475년에 乙力支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래 572년 北齊에 대한 조공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진 滿洲지역의 북방종족이다. 5세기 중반 이후 세력을 키워 고구려와 충돌하면서 부여를 압박한 과정이 『魏書』 물길전에 실려 있어 대체적인 활동상을 알 수 있다. 물길의 전신은 3세기 전반 장광재령의 동쪽 목단강 유역에 거주하면서 부여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읍루의 일부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서진하여 북위에 조공할 당시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길림성 扶餘市의 石頭城子 일대, 흑룡강성의 하얼빈 일대, 五常市, 依蘭縣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魏書』 물길전에는 속말수란 강과 도태산이란 산이 물길의 중요한 산천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존에는 速末水=松花江, 徒太山=白頭山이라 간주하여 왔으나 여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백두산 일대가 물길의 경역에 포함된다면 고구려가 그 지역을 영유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성곽 분포 등을 통해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물길의 중심지라 추정되는 지역과 백두산과의 거리도 400km 이상이어서 도저히 동일권역으로 묶어내기 어렵다. 그 밖에 『三國遺事』와 『帝王韻紀』 등 고려시대 기록에 백두산의 북쪽 길림성 敦化市가 틀림없는 渤海의 건국지를 도태산과 같은 산으로 추정되는 太伯山의 남쪽이라 한 것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위서』 물길전에 기록된 도태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길의 중심지를 고구려의 龍潭山城이 있는 길림시보다는 북쪽에 있으면서 멸망 직전 부여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農安 지역과도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찾아 현재의 오상시 일대로 볼 경우, 물길의 도태산은 長廣才嶺의 중심에 위치하여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를 이루는 大禿頂子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5세기 이후 등장하는 도태산을 현재의 백두산으로 쉽게 단정할 경우 당시 만주지역 고대국가 및 종족의 활동범위에 대해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勿吉は475年に乙力支を北魏に使臣で派遣することで歴史上初めて姿を現わした以来572年北斉に対する朝貢を終りに消えた満洲地域の北方種族である。5世紀中葉以後勢力を育てて高句麗と衝突しながら扶餘を圧迫した過程が『魏書』勿吉傳に載せられていて大体的な活動状況が分かる。 勿吉の前身は3世紀全般張廣才嶺の以東、牧丹江流域に居住しながら扶餘の圧迫から脱し始めた挹婁の一部に推定されっているが、これらが西進して北魏に朝貢する当時の中心地に対しては多くの意見が行き違っている。吉林省扶余市の石頭城子一帯、黒竜江省のハルビン一帯、五常市、依蘭市などがその例である。 ところが『魏書』勿吉傳には速末水と言う河川と徒太山と言う山が勿吉の重要な山河として記録されていて、既存の研究では速末水=松花江、徒太山=白頭山だと見ていたが、ここには納得しにくい問題がある。もし白頭山一帯が勿吉の境域に含まれたら高句麗がその地域を領有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結論になる。しかしこれは高句麗の城郭分布等を通じて見る時、受け入れにくいし、勿吉の中心地だと推定される地域と白頭山との距離も400km以上なので到底同一圏域で縛り出しにくい。また『三国遺事』と『帝王韻紀』など高麗時代の記録に白頭山の北、吉林省敦化市が間違いない渤海の建国地を徒太山と同じ山に推定される太白山の南側としたことも見逃しにくい。このような点を考える時、『魏書』勿吉傳に記録された徒太山は現在の白頭山ではない可能性が非常に高い。勿吉の中心地を高句麗の竜潭山城がある吉林市よりは北にある、また滅亡直前の扶餘の中心地に推定される農安地域ともあまり遠くない、と見れば現在の五常市一帯に比定される。それで5世紀中葉、勿吉の徒太山は長広才嶺の中心に位して吉林省と黒竜江省の境界を成す大禿頂子山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思われる。 十分な検討が成り立たなければならないが5世紀以後登場する徒太山を現在の白頭山だと考える場合、当時満洲地域の古代国家及び種族の活動範囲に対して深刻な矛盾が発生するのが明らかなのでもうちょっと多様な角度で検討する必要があることを強調した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