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열기/닫기 버튼

수감생활과 결핵으로 인해 28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56편의 시, 1편의 장편소설, 15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35편의 수필과 같은 방대한 작품을 남긴 이상(李箱 1910-1937)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 작가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은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왕권의 탈취와 정치적 암살이 핵심적 사건이 되는 『햄릿』과 『맥베스』와, 사극 중에서는 난세의 풍자극인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와 『줄리어스 시저』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앞의 네 작품 중에서도 그에게 제일 중요한 작품은 두말할 나위 없이 『햄릿』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실로 이상의 많은 작품들, 즉 비정치적 경향의 작품들인 장편소설 『12월 12일』, 시집 『오감도』 「시 제5호」, 단편소설 『지주회사』와, 정치적 경향의 작품들인 단편소설 『실화』, 수필 「슬픈 이야기」, 시 「객혈의 아침」, 시 「출판법」, 시 「파첩」, 시 「정식」, 그리고 메타픽션 (극중 극) 경향의 작품들인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 단편소설 『종생기』, 수필 「슬픈 이야기」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이상의 비정치적 경향의 초기 시 「광녀의 고백」에,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는 비정치적 경향의 단편소설 『동해』에, 『맥베스』는 정치적 경향의 작품들인 시 「파첩」과 단편소설 『날개』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일제 강점기의 천재적 작가였던 이상은 그가 직면한 식민지적 허무주의 또는 패배주의를 초극하기 위하여 고뇌하였으며,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의미심장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그의 반체제적 정치 소설 『실화』의 주인공인 “불우(不遇)의 천재”의 신화적 원형으로서의 햄릿이었다. 그것은 매사에 회의적이며 과민한 자의식을 소유하고 우유부단한 사색형의 햄릿이 아니라, 소설 『종생기』의 “위풍당당 일세를 풍미할 만한 참신무비의 햄릿”이었다. 그는 햄릿을 “참신무비”의 지도자, 혁명의 화신과도 같은 “불우의 영웅”으로 변신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그에게 부단한 영감을 안겨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특히 『햄릿』과 함께, 일제 강점기의 허무와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식민지 출신의 “불우의 천재”로서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