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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아나키즘이 당대의 모순을 해석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해법을 제시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 점이 아나키즘 진영에서 여타 아나키스트들과 유림과의 차이점이고,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1929년 11월 10일과 11일에 열릴 예정이었던‘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1929년 11월 1일 유림은 이홍근, 최갑용 등과 함께‘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연맹의 결성은 최초의 전국단위 아나키즘 조직으로서 운동의 고립 및 분산을 지양하고 통일적인 전선을 결성하므로써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에 비해 조직적이지 못했던 종래의 아나키즘운동을 연대하여 고조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 후 유림은 연맹의 활동 차원에서, 독립운동 인재양성을 꾀하려고 1930년 만주 봉천에‘의성숙’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원산지역 아나키즘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노동운동에 관여하였다. 남상옥을 파견하여 ‘원산청년회’를 재건하였고 아울러‘원산일반노동조합’ 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유림이 노동운동에 주목한 결과이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아나키즘운동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던 대중기반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지식인들의 사상운동이나 의열활동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유림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아나키즘 조직에 밀접하게 관여하였고, ‘코뮨’을 기초로 하여‘자유연합’에 의한 체제변혁을 꾀하면서도 대중적 기반과 연계, 노동운동의 고양을 모색하였다. 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대중의 각성과 이를 통한 체제변혁에 있다면, 유림의 이러한 활동은 아나키즘운동의 질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더불어 ‘아나르코 생디칼리슴’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는 유림의 아나키즘은 본인이 임시정부에 참가하는 논리와 임시정부가 연합전선을 펼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사상의 탄력성을 보여주었다. 그에 의하면 전 민족 구성원이 일치단결했던 3∙1운동의 결과로 자유연합에 의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성립 초기의 임시정부는 자율정부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과 괴리되어 그 성격이 변질되었으니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혁명역량을 모으는 혁명정부가 되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각 정파가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되 연대하고(黨派合同􃓗異), 정부는 공동으로 구성해서 서로 책임지자(政府共戴均擔)는 자유연합에 의한 연립혁명정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라는 강제권력을 해체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유림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기층대중의 역량결집에서 그 해답을 찾았고, 아울러 교육을 통한 혁명간부 인재양성과 한중무장항일운동의 조직화가 절실하다고 보아 여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일관된 논리는 전통의 바탕 위에 시대의 실정에 맞는 아나키즘의 창조와 운용이었다. 유림은 민족해방운동시기에 부단한 이론적 천착(穿鑿)과 현실에서의 치열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아나키즘을‘실현 가능한 이상’으로서 이해될 수 있게 한국아나키즘운동이 세계아나키즘운동사에 내놓은 빛나는 성과인‘독립노농당’의 창당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