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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조선후기의 국왕 정조의 도성 밖 움직임, 즉 능행과 수원화성행차 등의 동선(動線)을 조사하여, 국왕의 활용공간과 정치재량권이 상호 비례한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정조실록』에 있는 정조의 동선을 그 이전의 세종이나 영조, 그리고 그 뒤의 순조의 동선과 비교했다. 그 결과 정조는 순조보다 훨씬 더 자주 백성들을 만났음을 파악했다(각각 연 평균 2.7회와 0.5회). 궁궐 안에서만 살았던 순조와 달리 정조는 백성들을 자주,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해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조는 순조보다 정치재량권 - 이른바 왕권 -이 더 컸다. 물론 국왕의 재량권을 구성하는 요소가 다양하기 때문에 언관의 탄핵에 대한 거절만으로 왕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동안 막연하게 이야기되어왔던 왕권의 크기를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일정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조사 결과 순조가 언관들의 탄핵을 ‘거절’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왕 정조보다 낮았음이 밝혀졌다. 도성 밖 행차 등의 행동반경이 정조보다 좁았던 순조는 탄핵을 거절할 수 있는 재량권에 있어서도 작았던 것이다. 그러면 이 연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조가 조선 후기의 혁신군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득세력인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인데, 그 힘이 직접 백성들을 만나고 소통한 데에서 발원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의 세종이 그랬듯이 정조는 중간관리층의 방해 없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아울러 왕의 재량권도 커졌던 것이다.


This article's purpose is to prove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s' palace-outside movement and Royal Power. For this, I explored Movement of King Jeongjo and King Soonjo. As a result, I found that King Jeongjo had gone more frequently outside palace than King Soonjo: King Jeongjo and King Soonjo moved 2.7 times and 0.5 times per year respectively. What’s interesting is the fact that King Jeongjo's 'refusal' frequency of the censors' impeachment for bureaucrats is higher than that of King Soonjo. King Soonjo who mounted the throne at the age of 11 as a son of King Jeongjo had a little discretion power. He said "no" 66% against the censors' impeachment for bureaucrats while King Jeongjo's refusal accounted at a rate of 70%. King Jongjo had higher than King Soonjo in not only the legal discretionary power but also movement range. His driving power for reform was prompted by his royal autho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