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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발해 5경 즉 上京龍泉府, 中京顯德府, 東京龍原府, 南京南海府, 西京鴨淥府와 관련되는 문헌사료를 중점적으로 정리해본 결과 발해 5경 명칭의 출현 시기는宣 王 대 이후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발해 5경에 관한 체계적 사료는 『신당서』발해전에서 확인 할 수 있는데 그것은 張建章의 『渤海國記』 를 인용한 결과인 것 이다. 『발해국기』는 835년 이후에 성립된 저술로서 당나라 幽州에서 파견된 사신장건장이 833년부터 834년까지 약 일 년 동안 발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둔 현지조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당나라 천보 연간에 발해에서 도성을 상경으로 옮기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과연 “고금제도를 받아들였다”는 발해에서 당나라에 앞서 상경을 비롯한5경이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는 『신당서』보다 앞서 성립하는 제 사료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舊唐書』에는 발해5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신당서』에 편입된 지리지에는 가탐도리기를 인용하면서 발해의 지명 즉 渤海長領府, 渤海王都, 丸都縣城, 顯州등을 언급한곳이 있다. 현주에 관해서는『武經總要』에서 『皇華四達記』를 인용하면서 天寶이전에 발해에서 도읍지로 정한 곳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賈耽古今郡國志』를 인용하면서 발해국 南海, 鴨淥, 扶餘, 柵城 四府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가탐고금군국지』도 신당서 지리지에서 인용한 가탐도리기도 원명은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다. 이 저서는 801년에 성립된 것이나 발해도성, 책성부와 같이 발해와 관련되는 지명정보는 762년경에 발해와 신라로 파견된 당나라사신 한조채가 전했다는 연구가 있다. 그러므로 가탐도리기를 통해서는 8세기 60년대쯤에 발해에 5경의 명칭이 없었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797년에 성립된 『續日本紀』에서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건너간 기록을 확인해보면 739년에 若忽州都督 胥要德, 758년에 木底州 刺史 揚承慶, 759년에 玄菟州 刺史 高南申이 일본사신으로 파견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777년에 발해사신 史都蒙 일행이 발해 남해부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8세기 후반의 기록에서도 발해5경의 명칭이 없으며 『신당서』발해전에서 나오는 남경남해부도 남경이라는 기록은 없고 다만 남해부라는 명칭만 보인다. 주의 명칭도 『신당서』 발해전에서 나오는 “龍州”, “慶州”등 한 글자 주명과는 달리 “낙홀주”, “목저주”, “현도주”처럼 두 글자 주명이 보인다. 즉 일본에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서 적어도 8세기 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해에는 『신당서』발해전에서의 경부주 명칭을 확정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제 사료를 정리해본 결과 발해 제3대왕 문왕 大欽茂 시기에 5경의 명칭이 출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흠무 사후 발해에서는 한동안 혼란상태를 겪으며 818년 10대발해왕 선왕 大仁秀의 시기에서야 비로소 해북 제 부를 통솔하고 군현을 정비하기 시작 하였다. 발해5경의 설치는 방5,000리라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나서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靺鞨 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세운 5개소의 정치적 중심지의 명칭이 아니었을까 한다. 『신당서』발해전의 5경은 820년 전후 즉 선왕대 이후에 발해에서 불렸던 명칭으로 판단되며 8세기후반기 대흠무 시기의 상경, 동경 등 명칭은 후세에서追 記한것으로 추정된다.



本文整理了有關渤海5京, 卽渤海上京龍泉府, 中京顯德府, 東京龍源府, 南京南海府, 西京 鴨淥府的相關史料後, 得出結論爲渤海5京稱謂的出現時期應爲宣王以後. 關於渤海5京的詳細內容記載在《新唐書》渤海傳, 這是因爲該史料轉引了張建章《渤海國記》. 《渤海國記》成書於835年前後, 其來源應是由唐朝幽州使節張建章833年至834年派往渤海並滯留 1年期間的所見所聞. 《新唐書》渤海傳記載:“唐天寶年間, 渤海遷都上京”. 但是, “習識古今制 度”的渤海, 其5京的出現是否比唐代5京的出現要早呢?這就有必要探討成書早於《新唐書》的其 他史料. 《舊唐書》未曾提及渤海5京, 《新唐書》地理志引用賈耽道裏記, 提及了渤海地名, 卽渤海長領 府, 渤海王都, 丸都縣城, 顯州等. 關於顯州, 《武經總要》引用《皇華四達記》提到顯州在唐天寶 以前爲渤海都城. 《三國史記》中引用了《賈耽古今郡國志》提到渤海國南海, 鴨淥, 扶餘, 柵城四 府皆爲高句麗舊地. 《三國史記》中引用的《賈耽古今郡國志》以及《新唐書》地理志引用的賈耽道裏記, 《武經總要》引 用的《皇華四達記》, 其原名都是《古今郡國縣道四夷述》. 該著作雖成書於801年, 但有學者認爲 渤海都城, 柵城府等有關渤海地理稱謂的信息來源於762年左右出使渤海, 新羅的唐朝使臣韓朝 彩之手. 所以, 通過賈耽道裏記可知8世紀60年代渤海沒有出現5京這一稱謂. 從《續日本紀》(成書於797年)中的渤海出使日本史料可知:739年若忽州都督胥要德, 758年木底 州刺史揚承慶, 759年玄菟州刺史高南申等先後派往日本, 還有777年渤海使臣史都蒙一行出使日 本時起航於渤海南海府. 見於8世紀後半期的日本史料中無法找到渤海5京稱謂. 還有, 《新唐書》 渤海傳中的南京南海府, 在《續日本記》中沒有南京這一前綴. 州的稱謂和《新唐書》渤海傳中所見 “龍州”, “慶州”等一字州名不同, 而是如“若忽州”, “木底州”等使用二字州名. 故此, 從日本史 料可知至少在8世紀30年代, 渤海還沒有完全確立《新唐書》渤海傳中所見京府州之稱謂. 綜上史料整理, 筆者認爲:依據現有史料, 渤海第三代文王大欽茂時期, 尙未具備渤海5京之 稱謂. 大欽茂去世以後, 渤海進入一段混亂期, 直到818年第十代宣王大仁秀時期才“討伐海北諸 部, 開大境宇”. 筆者認爲渤海5京是爲了進一步掌控方5000裏廣闊領土之後, 爲了有效的統治散處各地的靺鞨各部而設立的5個行政中心的稱謂. 《新唐書》渤海傳之5京應是820年前後卽宣王以後出現的稱謂, 8世紀後半, 文王時期的上京, 東京等稱謂應該是後代的追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