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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음식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이제 막 시작단계에 있다. 생활유적에서 비교적 접하기쉬운 취사용기는 당시의 음식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적합한 고고자료이다. 본고에서는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완형의 취사용기를 대상으로 하여 우선 각 취사용기에 대한 검토를 한 후, 검토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에 어떠한 취사방식이 존재했는지 살펴보았다. 또한 시기에 따른 취사방식의 변화양상을파악하고, 더 나아가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배경까지도 밝혀보고자 하였다. 고구려 취사용기는 심발형토기, 시루, 부형토기, 철제용기로 대표되고, 이를 사용한 취사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심발형토기를 사용한 조리법으로 시기에 따라 사용방법에 변화가생기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한지역 고구려 관방유적에서는 한성백제기와 유사하게 아궁이 앞이나노지에서 물이 적은 액상음식물이나 반찬류의 조리 등에 사용되었다. 둘째, 철제용기와 시루를 결합해음식을 쪄먹는 조리법으로 생활유적에서 시루가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찜 요리가 당시 일상적인조리법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철제용기를 단독으로 사용한 취사방식이다. 이외에도 다양한기종의 금속용기와 컵형 토기 등 보조적인 취사용기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건국전후로 편년되는 오녀산성 3기층에서는 취사용기로 심발형토기만 출토되고, 4세기말~5세기 초의 4기층에서는 심발형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용기, 시루도 확인되어 취사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루는 주지하다시피 결합식 취사용기로 솥과 시루의 공반관계를 파악 하면, 시루를 사용한 취사방식이 고구려 사회에서 보편화되는 시점을 찾을 수 있다. 고분벽화 및 성곽과 고분출토품을 통해 고구려에서는 4세기 이후 시루를 사용해 음식을 쪄 먹는 취사방식이 보편화되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에서는 다양한 변화가 발생한다. 『三國史記』의 고구려기사는 중·후기로갈수록 농업에 관한 기사가 증가하고, 고분벽화의 주제 중 방앗간은 평양·안악지역에만 채택된다. 그리고 고구려식의 독자적인 철제 농기구 체계가 확립되고, 우경도 보급되어 가며, 토기의 경우 배식용기와 저장용기가 증가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변화양상은 4세기 초 농업환경이 우수한 한반도 서북부지역으로 진출하는 등 적극적인 영토의 확장과 철제 농기구의 보급 등으로 인한 농업의 발전,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이후 시루를 사용한 취사방식의 보편화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고구려의 생업경제 측면에서는 4세기를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와 동일한 흐름 속에서 蒸食도 보편화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高句麗の飮食文化に對する考古學的の硏究はいまとば口の段階だ.生活遺跡で比較的に接しやすい炊事容器は当時の飮食文化を調べるために適合な考古資料である.本稿では高句麗の遺跡で出土された完形の炊事容器を對象にして,まず別々の炊事容器に對する檢討をした後,檢討した內容を基に当時にはどんな炊事方式が存在したのか調べて見よう.また,時期による炊事方式の変化樣相を把握し,さらに変化が發生することになる背景も明らかにしたい. 高句麗の炊事容器は深鉢形土器,甑,釜形土器,鐵製容器に代表され,これを使用した炊事方式は大きく三つで分けることができる.第一,深鉢形土器を使用した調理法で時期にしたがって使用方式に違いがあると推定されるが,南韓地域の高句麗の關防遺跡では漢城百濟期と同樣に竈の前とか爐で水が少ない液狀飮食物とかおかずの調理等に使用した.第二,鐵製容器と甑を結合して飮食を蒸して食べる調理法で生活遺跡で甑が多量出土してことを見れば蒸し料理が当時に日常的な調理法の一つだっ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第三,鐵製容器を單獨に使用した炊事方式だ.以外にも樣々な金屬容器とコップ形土器等補助的な炊事容器を活用した. 建國前後に編年される五女山城3期層では炊事容器に深鉢形土器だけ出土されて,4世紀末~5世紀初の4期層では深鉢形土器を始め鐵製容器と甑も確認されて,炊事方式に違いがあることを分かる.甑は結合式炊事容器で釜と甑が共に出土される關係を把握すると,甑を使用した炊事方式が高句麗の社會で普遍化される視点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古墳壁畵及び城郭と古墳出土品を通じて高句麗では4世紀の以後には甑を使って飮食を蒸して食べる炊事方式が普遍化されて行くと推定される. 4世紀を基点に高句麗では樣な変化が發生する.『三國史記』の高句麗の記事は中·後期に行くほど農業に關する記事が增加して,古墳壁畵の主題の中でからうすは平壤·安岳地域だけ採擇される.そして高句麗式の獨自の鐵製農機具体系が確立して,牛耕も普及されて行く.また土器の場合は配食容器と貯藏容器が增加する樣相が確認される.このような変化樣相は4世紀初,農業環境が優れる韓半島の西北部地域に進出する等積極的な領土の擴張と鐵製農機具の普及等による農業の發展,農業生産力の增大と關連されると見られる.4世紀の以後,甑を使った炊事方式の普遍化もこれと密接な關連があるだろう.つまり,高句麗の生業経濟の側面で4世紀を前後して多く変化が發生し,これと同一の流れの中で蒸食も普遍化されて行くと理解さ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