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열기/닫기 버튼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지난 100여 년간 끊임없이 연구되었지만 고대 한일관계의 주도권 문제에 沒入된 측면이 크다. 다행히 근래에는 다양한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王碑의 실체에 좀 더 접근하고 있다. 입비목적에 관련한 논의도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연구 성과 또한 상당히 축척되어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覇者로 자리매김한 고구려의 위상’이라는 결과론적 思考로 석비의 성격을 파악하다보니 비문 撰者의 의도나 입비의 원래 목적은 看過된 느낌이다. 주지하듯이 王碑가 세워진 5세기 초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고구려가 이제 막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입비 주체는 광개토왕의 ‘廣 開土’라는 업적 외에 대내외적으로 名分으로 내세울 훈적을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비문에서 전투기록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攻破의 원인을 함께 밝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7회의 전투 기사를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전투․원정기록은 대체로 ‘不貢’과 ‘不軌’를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그 대상은 ‘屬民’이라는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속민은 실제 관계라기보다 정토의 명분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구려의 일방적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고구려와 百濟, 東夫餘 사이에는 ‘同類意識’이 존재하고, 정체가 모호한 帛愼도 비문의 내용상 新羅境內의 同類로 파악할 수 있는 바, 비문의 찬자는 광개토왕의 업적 중에서 同類統合과 倭, 碑麗 등 他類로 부터의 同類救援을 가장 큰 훈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통합된 동류민호는 新來韓穢로 지칭되며 守墓의 力役을 지는 고구려민으로 편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석은 이러한 과정과 복속민에 대한 諸規程을 법령으로 새김으로서 대내외적으로 정토활동의 명분과 정당성을 선포하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하였다고 하겠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に関しては、去る100余年間絶えず研究されたが、古代韓日関係の主導権問題にかたよった側面が大きい。幸いに、近来には多様な主題に研究が進行されながら、王碑の実体にもっと接近いている。立碑目的に関する論議も長年の期間にかけて進行されたし、その研究成果もよほど蓄積されている。しかし、‘東アジアの覇者に位置づけた高句麗の位相’という結果論的な思考に碑石の性格を把握して見ると、碑文撰者の意図や立碑目的は見逃してしまったと考える。周知のとおり、王碑が立てられた5世紀初は、東アジアの複雑な力学関係の中で、高句麗がまさに主導権を確保し始めた時期である。このような時点に、立碑の主体は広開土王の‘広 開土’という業績の外、対内外的に名分を立てる勳績を記録しようとしたはずだ。こうして、この論文では碑文に戦闘記録等を記すにおいて攻破の原因を一緒に明らかにしているという点に注目して、7回の戦闘記事を分析した。その結果、戦闘(遠征)記録はおよそ‘不貢’と‘不軌’を原因にしているし、その対象は‘属民’という概念に設定されていた。属民は実際の関係というより、征討の名分を極大化するための高句麗の一方的表現と見える。しかし、少なくとも高句麗と百済と東夫余との間には‘同類認識’が存在し、正体が曖昧な帛愼も碑文の内容に見るとき新羅境内の同類に把握することができる。したがって、碑文撰者は広開土王の業績の中で、同類統合と倭と碑麗など、他類からの同類救援を最大の勳績に表現しようと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る。このように統合された同類民戸は新来韓穢に指称されて、守墓の力役を負担する高句麗民に編成されたことと言える。碑石はこのような過程と服属民に対する諸規程を法令に記して、対内外的に征討活動の名分と正当性を宣布しようとする目的が一番多きいと言え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