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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東唱酬集』은 고조선부터 조선왕조말기까지 韓中 양국의 문인이 상대국에 대하여 기록한 詩文이나 서로 주고받은 시문과 편지 등을 모은 總集類 문헌이다. 편찬자는 譯官 金秉善(1830~1891)이다. 『화동창수집』은 최근 김영진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화동창수집』은 澗松美術館에 7冊(22권. 表題는 唱酬集), 日本 東洋文庫에 22冊(藤塚鄰 舊藏本), 天理圖書館에 8冊(今西龍 구장본), 미국 하버드옌칭도서관에 2冊(藤塚鄰 구장본. 表題는 華東倡酬集), 모두 39冊이 현존한다. 간송본은 수집 작품이 왕조․시대 및 작가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비해, 해외소장본은 대체로 저본 및 문체에 따라 자료가 수집, 선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題詞(題辭)는 동양문고본 1-2책 즉 華編續第四, 동양문고본 4-1책 즉 華編續第一에 실려 있다. 후자가 ‘海隣圖卷十種’으로 편성되어 있다. 海隣圖卷十種 가운데 「海客琴尊第二圖題辭」를 제외한 9종은 李尙迪 사후 1870년대에 김병선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들을 전사한 것이다. 「海客琴尊第二圖題辭」는 이상적의 집안에 소장된 圖卷 형태의 原本을 보고 전사한 것이다. 「海客琴尊第二圖題辭」의 첫 글은 <海客琴尊第二圖>에 대한 梅曾亮의 記文이다. 여기에는 매증량의 문집에 실린 개작본 「海客琴尊圖記」를 대본으로 한 교감이 가해져 있다. 즉 매증량의 「海客琴尊圖記」 初稿는 동양문고본 『화동창수집』에 轉寫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또 앞뒤 낱장에 매증량의 「悲金臺山」, 「臺山論文書後」, 「臺山氏論日本訓傳書後」가 추록되어 있다. 「臺山論文書後」는 매증량의 문집에 실려 있는 개작본을 전사한 뒤, 金邁淳의 문집에 남아 있는 初稿와 對校해 두었다. 그리고 「悲金臺山」, 「臺山氏論日本訓傳書後」, 「臺山論文書後」, 「海客琴尊圖記」 순으로 배열하고자 하였다. 즉 ‘해린도권십종’이라는 원본 또는 저본 단위로 자료를 수집하여 일단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 필요에 따라 교감한 뒤, 이를 다시 작가 단위로 재편하여 ‘王朝 → 作家 → 詩 → 文’의 순으로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藤塚鄰은 동양문고본 『화동창수집』 전체에 걸쳐 주묵 등의 흔적을 남겼다. 海隣圖卷十種은 그 중에서도 많은 편에 속한다. 藤塚鄰은 海隣圖卷十種 가운데 자신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거나 원본의 소장처를 알고 있는 작품은 원본에 의거해 교정을 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서 「海客琴尊第二圖題辭」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원본이 아니라 『화동창수집』으로 본 것이다. 藤塚鄰은 연구 자료의 원본을 수집하고 정리․활용하는 데 철저했다. 그는 학위논문 이전에 『화동창수집』을 입수하여 연구에 활용하였다. 그런데 학위논문과 그 이후의 저술에서 『화동창수집』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학위논문이 김정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원본을 중시했던 그에게 轉寫가 대부분인 『화동창수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을 수 있다. 藤塚鄰은 『화동창수집』 자체를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료의 입수와 독서를 통해, 한중교류 전반을 학습하여 연구의 커다란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동시에 조선의 문인과 교류한 청나라 인물 및 관련 작품 등의 기본 정보를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병선과 김준학의 자료수집과 轉寫․校勘으로 이루어진 『화동창수집』은 1910년대 亡國과 함께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1926년 이후 藤塚鄰이 입수하여 연구에 활용함으로써 되살아났다. 그러나 1951년 무렵 세상에 나와 1955년 동양문고에 들어간 뒤 다시 60년 넘게 잊혀 있었다. 藤塚鄰은 비록 『화동창수집』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지만, 『화동창수집』이 다시 살아나 血色을 되찾는 데 그가 침묵 속에 적어둔 붉은 먹이 가장 큰 보탬이 되고 있다.


『Hwadongchangsujib(華東唱酬集)』, compiled by Kim Byeong-seon(金秉善, 1830-1891), is a general collection of writings on China by Korean writers or vice versa and letters exchanged between the two countries from Gojoseon(古朝鮮) to the late Joseon(朝鮮) Dynasty. Among the 39 versions of the book, seven are stored at the Gansong Art Museum(澗松美術館), 22 at the Toyo Bunko(東洋文庫), eight at the Tenri Central Library(天理圖書館) and two at the Harvard-Yenching Library. While the versions at the Gansong Art Museum contain works organized by dynasty/era and author, those at overseas libraries include materials selected according to original copy and writing style. The 10 pieces of Haelindogwon(海隣圖卷) can be found in Version 4-1 at the Toyo Bunko. 「Haegaekgeumjunjeido Jesa(海客琴尊第二圖題辭)」, one of the 10 pieces of Haelindogwon, was copied from the original scroll in the house of Lee Sang-jeok(李尙迪). As noted in the book by Mei Cengliang(梅曾亮), the compiler of 『Hwadongchangsujib』 first gathered original copies to form a collection and then reorganized the selected works in the order of dynasty, author, poetry, and prose. Fujitsuka Chikashi(藤塚鄰) left proofreading marks throughout the Toyo Bunko’s 『Hwadongchangsujib』. One of the most heavily proofread works was the 10 pieces of Haelindogwon. 「Haegaekgeumjunjeido Jesa」 is introduced in Chikashi’s doctoral thesis. Even though Chikashi acquired 『Hwadongchangsujib』 for study and research before working on his thesis, he left no earlier mention of the book. 『Hwadongchangsujib』, born from the efforts of Kim Byeong-seon and his son Kim Jun-hak(金準學) in collecting and editing various writings, was briefly forgotten in the 1910s with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but was resurrected in the late 1920s thanks to Fujitsuka Chikashi. For more than 60 years after Chikashi’s death, 『Hwdongchangsujib』 was again dropped from memory. Nevertheless, what remains undeniable is that the red ink marks left behind by Chikashi breathed life into 『Hwadongchangsujib』 and allowed it to regain its p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