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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후반 한국과 일본 시단에는 '광야'를 제명으로 한 작품군이 산견되는데, 지배-피지배라는 역사적 조건이 이 작품들 속에도 상당 정도 반영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의 경우는, 만주개척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낭만적 광야’시로서의 면모(임학수), 유배자의 절망과 회오(유치환), 종말적인 미래관으로 현실을 초월하려는 적극적 의지(이육사)가 발견된다. 일본측의 ‘광야’ 관련 시들에서는, 정복자로서의 자의식이 깔려 있는 여행자 시(곤도 아즈마), 서정적 논리에 충실한 고풍한 여정시(무로오 사이세이), 죽음을 동경하는 “붕괴된 청춘”으로서의 자기 이미지(이토 시즈오)가 발견된다. 양국의 ‘광야’시 속에는 서로에게 없는 세계를 독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풍모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의 경우와 같은 여유있는 여행자 풍의 서정시가 없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과 같은 고뇌감 내지 강렬한 정서적 반응이 깔린 시가 이노 시즈오 외에는 없다. 이것은 ‘광야’를 바라보는 안목 속에 지배-피지배라는 역사적 맥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확인가능케 하는 예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예가 이토 시즈오와 이육사의 경우다. 두 시인 모두 ‘만주’ 거주나 견문 등의 구상적인 체험과는 거리가 먼, 강력한 주관적 정신의 현상물로서의 ‘광야’상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 정신적 지향점이 정반대라 할 수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토는 죽음을 이상적인 안식처로서 동경하는 “붕괴된 청춘”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육사는 절망적 현실을 극복하는 강인하고도 웅대한 미래지향적 비전을 품은 자기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배국과 피지배국을 대표하는 두 ‘광야’시의 면모가 이렇게도 양 극단을 지향하고 있는 점, 이 점이야말로 양국의 ‘광야’시의 위상의 차별성을 드러낸 가장 선명한 예라고 생각한다.



1930年代の中・後半の朝鮮と日本詩壇では、'曠野'を題名とした作品群が散見されるが、両国がおかれてい支配-被支配という歴史的な条件がこの作品群の中に相当反映され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る。朝鮮の場合は、「満洲」開拓イデオロギーを宣伝する「ロマンチックな広野」詩としての面貌(林學洙)、流刑者の絶望と悔悟(柳致環)、終末的な未来観を通して現実を超越しようとする意志(李陸史)が発見される。日本側の「広野」詩の場合は、征服者としての自意識が基盤をなしている旅行詩(近藤東)、抒情的論理に充実した古風な旅情詩(室生犀星)、死を憧れる“崩れた青春”としての自己イメージ(伊藤静雄)が発見される。 両国の「広野」詩は、相手側にはいない世界を独自に所有している面がある。朝鮮の場合は、日本のような余裕のある旅情詩は見つからない。一方日本の場合は、朝鮮のような苦悩もしくは強烈な情緒的な反応が伴われている詩は、伊藤のほかにはいない。これは、両国の詩人が「広野」をみる視線にの中に、支配-被支配という歴史的な脈絡が相当な影響を及ぼしていたことを確認させる例であると思われる。そのような面貌を一番鮮やかにあらわしている例が伊藤静雄と李陸史のケースである。 二人はともに「満洲」居住や見聞などの具象的な体験とは離れている、強力な主観的精神の現像物としての「広野」像を示している。またその精神的なベクターが正反対を向いているともいえる特徴も示している。伊藤は死を理想的な安息処として憧憬する”崩れた青春”としての自己イメージを、陸史は絶望的現実を克服する強靭で雄大なビージョンを抱いている自己イメージを提示しているのである。支配ー被支配国を代表する二つの「広野」詩の面貌がこのように激しく両極端を志向しているところ、この点こそ両国の「広野」詩の位相の差別性を現した最も鮮明な例であると思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