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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認(1566∼1622)의 字는 公識, 號는 錦溪로 전라도 나주시 하의리 사람이다. 선조 때 진사급제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장군 휘하로 들어가 수차례 공을 세운다. 하지만 1597년 6월 전라도 남원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시마즈 요시히로 아래에서 1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한다. 후일 중국복건성의 관리인 임진혁 등의 도움을 얻어 1599년 3월 17일 일본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1일 후 중국 福建省 浯縣에 도착한다. 복건성 정부의 안배로 장주와 흥화를 거쳐 복주에서 3개월여 생활을 하다 명나라 만력황제의 허가를 얻어서 1599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온다. 포로생활부터 귀국에 이르기까지 魯認은 거의 매일 읽기를 작성하였는데, 현존하는 일기는 1599년 2월 22일부터 동년 6월 27일까지 약 4개월여의 기간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는 당시 복건성의 풍속습관과 사회문화 및 학술사상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강 이남의 風教와 禮制, 과거제도 등에 관해서도 상세히 언급하고 있어 16세기 말엽의 복건성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학계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단지 임진문학의 측면에서만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본 논문에서는 <금계일기>에 수록된 당시 武夷書院의 상황과 서원에서 개최한 “講學大會”의 특징과 내용, 당시 명나라의 과거제도 실행상황 및 그것이 조선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여부 등, 당시 학술사상과 서원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錦溪日記≫의 학술사료적인 가치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만약 15세기 말엽 명나라의 절강성과 강소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운하 주변의 지역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것이 최부의 ≪漂海錄≫이라고 한다면, 한 세기 후에 나타난 ≪錦溪日記≫는 16세기 말엽의 복건성의 학술과 정치, 윤리문화, 예제와 풍속 등에 관한 풍부한 기록으로 당시 복건성의 면모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문물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