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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후반 전반적으로 주리설이 확산되는 배경하에 영남지역에서 기호학파인 노사학파와 심즉리설을 주장한 한주학파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두 학파간에 어떠한 학술 교류를 진행하였는가를 검토한 것이다. 먼저 영남지역의 노사학파는 영남 사림들이 기호학통 계통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유하면서 형성되었다. 기정진 대에는 함양의 정여창 가문과 장성의 김인후 가문이 혼반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함양의 사림들이 기정진을 자주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양의 정여창 가문과 가까운 산청의 여흥민씨 가문을 비롯해서 진주의 趙性家, 崔琡民이 찾아오고, 합천에서 鄭載圭 등이 찾아오면서 노사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영남의 노론가문 출신으로, 왜란 때 창의하였거나 이괄의 난 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상당기간 동안 영락한 집안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당대나 부친 대에 재산 형성에 성공하고 학문을 통해서 영남지역에 다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학문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이 지역 노론 가문과 연대를 강화해 나갔으며, 조식과 정여창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그들의 선양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해 갔다. 그러한 결과 하동, 진주, 산청, 함양, 합천, 의령 일대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지고,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한주학파는 寒洲 李震相(1818-1886)이 1870년에 이르러서야 허유 등에게 비로소 적극적인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영남 서부 지역은 오랫동안 퇴계학설의 영향이 깊은 곳으로 이진상의 심즉리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진상은 자신의 심즉리설이 주자와 퇴계설의 근본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이진상이나 그의 문인들은 정재규와의 논쟁을 통해 호남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던 기정진으로부터 자신들의 학설을 입증받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진상의 호발설이나 명덕, 지각설 등이 기정진에 의해서 검토되었고, 이진상이나 허유, 곽종석 등은 기정진의 학설중에 사단칠정을 리발로, 명덕을 리로, 지각을 리의 작용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남 지역 노사학파는 지각설이나 심설에 대해서 이진상의 학설과 밀착되게 되어 기정진의 학설이 더욱 주리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영남지역 노사학파와 한주학파는 이진상 사후에도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져 노사학파의 조성가와 최숙민, 정재규, 그리고 한주학파의 허유, 곽종석간에 밀접한 교분이 있게 되었다. 특히 정재규는 허유와 함께 삼가지역의 학문을 이끌면서 함께 조식을 크게 선양하였으며, 곽종석과도 자주 성리학과 시국에 대해 토론하였다.


Nohsa(蘆沙) Scholars’ faction in Youngnam area was formed through Yeongnam Sarim(士林-gentlemen) increasingly keeping company with Nohron (老論-a political party). in the 19th century. Not only Jung Yeo Chang(鄭汝昌)’s family firmly tied with Kim In Hoo(金麟厚)’s family by marriage but also many scholars all around Jinju, Sancheong and Hapcheon including Jo Sung Ga(趙性家), Choi Sook Min(崔琡民), Jung Jae Gyoo(鄭載圭) and etc. Most of Nohsa Scholars’ families in Youngnam area tried to make scholarly achievement based on their economical success around the 19th century. They made strong connection with Nohron families in that area based on their scholarly power and extended their activity spaces by conducting various activities in that area where Jo Sik and Jung Yeo Chang were respected. Gi Jung Jin’s philosophy of Li-Yil-Li-Bun-Soo(理一理分殊) and idea of Wi-Jung-Cheok-Sa(衛正斥邪) deeply influenced Hanju Scholars’ Faction. For although Hanju(寒洲) Scholars’ Faction in 1870’s period was formed in Youngnam area by the scholars including Heo Yu(許愈), Gwak jong suk(郭鍾錫), Lee Jeong Mo(李正模) etc, facing to Lee Hwang(李愰) scholars’ attact to the theory of mind equal to reason(心卽理), Hanju Scholars’ Faction wanted to firmly establishing the theoretical faundation by suppoting Nohsa(蘆沙)’s theory. Therefore in the theory Hanju(寒洲) Scholars’ Faction was similar to Nohsa(蘆沙) Scholars’ faction and Heo Yu(許愈), Gwak jong suk(郭鍾錫) was deeply tied with Jung Jae Gyoo(鄭載圭) in the many sides including political, social, scientific activi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