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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계보, 즉 사승 관계의 계보를 파악한다는 것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어떤 한 인물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여기에서는 즙산(山)이 어떤 학문상의 전승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철학사상 형성의 배경에 있어서 주변 인물들과의 교류 양상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하여 검토를 진행하였다. 그래서 본고 山의 학문적 계보에 관한 一考察에서는 주로 즙산의 사우(師友) 관계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으로 하였다. 우선 사승 관계로부터 본 즙산의 학문적 계보상의 위치를 확인하고, 초기의 즙산의 우인 및 인맥 양상을 고찰하였다. 사승 관계를 제외하고 즙산이 전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우인(友人)으로써 인정한 인물은 다섯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동림파 내지는 동림파와 관련된 인물들이었고, 절강과 강소라는 지역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다. 명대 사상사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이들은 또 양명학 좌파의 ‘무선무악설’에 대한 강한 불만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스승 허부원이라는 인물의 실상과 스승과의 만남에 관해서 총체적으로 의론을 진행하였다. 허부원은 즙산의 사상 형성과 관료 생활에 있어서 가장 좋은 모범이자 본보기로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으며, 그는 스승 허부원의 가르침을 통해서 정주학(程朱學)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결국 ‘극기’의 중시와 ‘무선무악’ 비판이라는 즙산에게 있어서의 허부원 학문의 계승은 만남의 그 순간뿐만 아니라, 즙산의 만년에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즙산 학문세계의 정신은 스승 허부원과 만난 이후부터 인생 최후의 순간까지 기본적으로는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본고를 통해서 즙산은 정주학적(程朱學的) 사승 관계, 즉 정주학의 학맥을 잇고 있었으며 초기의 인적 교류는 다양한 학문적 유파의 인물들과 교유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동림파 인사들과 폭넓고 깊은 인맥을 형성하면서 후일 사상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양명학 좌파의 인물들과도 깊은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의 즙산학 연구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学問的系譜、すなわち師承関係の系譜をとらえるというのは、歴史の中に存在したある一人の人物の思想を理解することにおいて、最も先に先決すべき課題である。ここでは、蕺山はどういう学問上の伝承に属しているか、またその周辺にはどういう友人たちがいるかを検討してみた。そこで、本稿「蕺山の学問的系譜に関する一考察」では、主に蕺山の師友関係を検討した。まず、師承関係からみた蕺山の位置を確認し、初期における蕺山の友人及び人脈関係の様相を検討したのである。蕺山は、その生涯において何人かの友人があった。『劉宗周年譜』の万暦四十年(一六一二)条によれば、蕺山劉宗周の「平生道交の士」として交遊した人物は、ただ周應中・高攀龍・丁元薦・劉永澄・魏大中の五人だけであったという。このうち、丁元薦・周応中・魏大中は劉宗周と同じく浙江出身であり、そのほかの二人は江蘇(当時は南直隷)出身である。蕺山は科挙に合格した後、高攀龍を含む東林派人士と本格的に接触することになるが、彼らを結ぶ結節点の役割を果たしていたのが劉永澄であった。その以外、蕺山が交遊した人物たちの顔ぶれは、同年の進士、朱子学系の学者、東林派人士、陽明学左派の学者、地域の知識人等々多様である。こういう点からみると、蕺山の初期交遊の様相は、多様な人物たちとの接触であったことがわかる。次いで、師の許孚遠という人物像や師との出会いについて論ずることにした。人間の出会いは、人の一生を左右することがある。若い時の蕺山が許孚遠と出会ったのは、まさにそうであった。蕺山は、二十六歳のとき、初めて許孚遠と浙江の徳清で出会った。この時に許孚遠は六十九歳であった。したがって蕺山より、四十三歳年上ということになる。この出会いは、蕺山が希代の儒教思想家として大成するうえで、実に貴重な機会であったといえよう。許孚遠は、蕺山劉宗周の思想形成やその官僚生活において最もよい手本として決定的な影響を与えた人物であり、蕺山は許孚遠の教えを通して程朱学を本格的に学ぶことになる。つまり、「克己」の重視と「無善無悪」批判という蕺山における許孚遠の学のこうした継承は、出会いの頃だけではなく、蕺山の晩年にまで続く。蕺山の基本的な学問世界の精神は、師と出会って以来、人生の最後の時まで基本的に一貫したものであ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