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열기/닫기 버튼

『노자』(老子)의 해석사에서 『하상장구주』(河上章句注: 河上公注)는 통행본인 『왕필주』(王弼注)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술사상 가장 먼저 그것을 그려내고 있다. 『하상공주』는 한대(漢代)의 노자학을 보여주고 있으며, 『왕필주』는 위진(魏晉)시대의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상공주』는 초기 노자 이해의 원형(原型: prototype)이다. 그런데 역사는 『하상공주』가 아닌 『왕필주』를 선택했다. 왕필 이래로 노자학은 이른바 '의리학'(義理學)의 계보를 좇았고, 그 영향 아래 철학사가 쓰여졌다. 노자는 더 이상 하상공의 원리처럼 '양생술'(養生術)로 이해되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였다.그러나 『하상공주』가 『왕필주』보다 좀 더 원형에 가깝다면, 『하상공주』야말로 당시의 노자 이해와 세계관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된다. 왕필의 해석은 『노자』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일방적일 수 있다. 『노자』의 체계에서 존재론이나 우주론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다. 이를테면 '수양'(修養)과 연관된 많은 해석들은 『하상공주』에서 나오며, 그것은 '인간과 국가의 생명과 그 보존'에 대한 통일된 체계 속에서 자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상공주』의 연구는 『왕필주』가 지배해온 철학사의 보완이자 교정이다. 이전에는 분명히 『하상공주』의 시대가 있었다. 『노자』 사상의 수용사에서, 적어도 앞의 천년은 『하상공주』가 주도하고 있었다. 결국 『하상공주』를 보지 않으면 노학사의 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현대에도 『왕필주』는 철학적이고 『하상공주』는 종교적이라는 이분법 아래 『왕필주』는 도가를, 『하상공주』는 도교를 대표한다고 한다. 그러나 『곽점(郭店) 노자』나 『태일생수』(太一生水) 같은 지하문헌의 발견을 통해, 『노자』 해석의 역사에서 철학과 종교가 앞뒤의 역사를 지닌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더 이상 도가와 도교가 일도양단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바로 사마천이 말하던 '도가'(道家)와 '황로'(黃老)의 의미임을 알게 해주었다. 『하상공주』는 황로학적 노자 이해를 대표한다. 이 때의 황로는 통치술만이 아닌 양생술도 포함한다. 이런 황로술은 한대 전반에 걸쳐 유행했었고 『하상공주』는 그 시대적 위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상공주』에서 국가는 신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