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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편 전반부 132a1-b2와 132e7-133a3에 나오는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의 동일, 차이, 근거에 대해 논의한다.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는 133a8-9와 133b1-2에서의 그때까지의 “난제”에 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항상 “어떤 것을 규정하는” 우리 인간 존재에게 매번 나타나는 형상이 시간과 더불어 계속 생긴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그 형상을 바로 “있음이라고 생각되는” 관점으로부터 접근하고 다른 하나는 “동종적”이라고 규정되는 “참여”의 관점으로부터 접근하는 데 차이가 있으며, 각각의 근거는 주어진 무한소급논의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서만 규명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가 속해있는 직, 간접적인 문맥에서도 규명되어야 한다. “어떤 것”의 “규정”이란 조건 하에서 플라톤의 중기 이데아론에 대해 수행되는 조건부 비판은, 131a4-6과 133a5-6에서 보듯이, “형상”에 “참여”한다고 하는 “개별자”와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들”과의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의 관계의 문제, 말하자면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의 개별자의 형상에의 참여의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두 측면을 지니는데, 하나는 인과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인 측면이다. 개별자가 어떻게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 참여한다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인과적인 측면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개별자들의 형상에의 “참여”는, 132c9 아래에서 보듯이, 형상을 어떤 것의 존재 원인인 “본”이라 보고 그것과 닮아서 “동종적인 것들”이 된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닮게 됨”이라 규정되는 “참여”의 결과라고 보는 존재론적인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의해”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인과관계를 “동종적”이라 규정하면서 참여의 문제를 핵심에 놓고 “어떤 것”의 “규정”이란 조건 하에서 형상과는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의하고, 부정적으로 결론짓는 것이 두 번째 무한소급논의이다. 그런데 개별자의 형상에의 “참여” 내지는 형상의 개별자에의 “임재” 또는 양자의 “공유”라고 하는 존재론적인 인과관계는 “어떤 것”의 “규정”이라는 조건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자신의 조건으로서 논리적인 측면의 문제를 자체 내에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개별자들이 형상에 참여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논리적인 측면, 즉 “있음이라 생각되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논의하고, 부정적으로 결론짓는 것이 첫 번째 무한소급논의이다. 그런데 두 번째 논의가 첫 번째 논의로부터 직접 이어지지 않고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단순히 첫 번째 무한소급논의에서 이데아나 형상 그리고 참여라고 하는 존재론적인 인과관계가 어떻게 발전되고 전제되어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형상이나 인과관계를 전제할 때 그와 같은 형상과 그것의 조건인 어떤 것의 규정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다름을 전제로 하여 두 번째 무한소급논의는 참여라는 존재론적인 인과관계를 근거로 비록 양자가 다르지 않고 “동종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무한소급에 이르게 됨으로 부조리한 까닭에 그로부터 어떤 것의 규정 내지는 그것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은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 참여할 수 없고 이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돌이켜보면 비록 첫 번째 무한소급논의가 두 번째 무한소급논의와는 달리 참여라는 존재론적인 인과관계를 단지 묵시적으로 전제하고 어떤 것의 규정이라는 조건 하에서 그것에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첫 번째 무한소급논의는 두 번째 무한소급논의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점, 즉 어떤 것의 규정 내지는 그것에 결합되어있는 형상은 무한소급에 이르게 됨으로 부조리한 까닭에, 첫째,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 참여할 수 없으며, 둘째,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하였던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비록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에서 어떤 것의 규정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이 시간과 더불어 무한 소급함으로써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는 참여하지 못한다고 논의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의 규정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이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한소급논의 자신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관계라고 한다면,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어떤 것의 규정 내지는 그것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은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과 다르다는 결론뿐이다. 그로부터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이 어떤 것의 규정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에 대해 원인인 한에서 플라톤의 중기 이데아론은 여전히 성립하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주어진 현상의 세계에 대해 존재론적인 원인론으로서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것의 규정이란 조건 하에서의 이데아론에 대한 조건부 비판은 진지하게 수용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조건이 인정되는 한에서 그런 조건에 결부되어있는 형상이 나타나고 발생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그런 형상이 인정되는 한에서 그런 형상은 주어진 물리적인 현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과 다르다고 하는 한에서 그런 의미의 형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무한소급논의에 대한 Vlastos의 논리적 재구성은 Cornford와 같은 사람의 텍스트 이해에 기초하여 플라톤의 중기 이데아론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이데아를 그 자신 자기 자신에 따라 있는 형상이 아니라 마치 개별자와도 같은 어떤 사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전제 하에서 진행된 비판이다.


This paper studies in identity, difference, and grounds of the two arguments of infinite regress in Plato’s Parmenides 132a1-b2 and 132e7-133a3. According to the passages 133a8-9 and 132e7-133b1-2 which explain the problem until there the two arguments are identical in that for us who always determine something the Form appears to come to be with time and are different in that the first argument approaches it from the viewpoint of “seeming to be”, while the second does it from the viewpoint of participation regarded as “likeness”. But the grounds of the two have to be fixed in each case not only in analysing the given texts but also in determining the direct or indirect contexts. And according to the passages from 132b3 to d4 it is clear that the second argument supposes the Idea as being in itself and the ontological causal relation of participation as likeness of individual thing as copy to the Form as original explicitly while the first premises them implicitly. From this the two are identical in that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they approach the ontological relation of participation of individual thing as copy to the Form as original, and different whether they presuppose it implicitly or explicitly, in oder to show that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or the Form combined to it is different from the Form being in itself. Based on Cornford’s reading of the texts Vlastos makes a logical reconstruction of the two arguments and criticizes Plato’s middle Theory of Ideas, but the criticism results from the false assumption that it regards the Form as something like individual thing. However, Plato's Idea must be understood as Form being in itself. Even if such a Form in the two arguments is suspected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it is not negated absolutely by Plato but the criticism must be taken seriously because it is inevitable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The Form which is regarded as being in itself appears us to come to be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inevitably as an other Form and this is no more one but many in number and magnitude with time. But in the first argument it is argued as it appears us to come to be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while in the second it is argued as such in the causal relation of Form and individual thing like that of original and copy which are like to each other. However, they are identical in arguing the Form being in itself under the condition of determining something in the relation of participation ontologically which is nothing but that of likeness between the Form as original and the individual thing as co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