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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 들어서는 내외법 제정, 친영제혼속 적용, 종자법 시행, 총부법 폐지 등의 법제로 인해 가계계승과 봉제사가 혼인의 의미로 강화되었다. 여성의 경우 혼인을 통해서만이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고 자신의 삶을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에게는 순결과 정절을 강조하는 윤리가 강화되었다. 성종 때에 재가녀의 자손금고법攀 재가 했거나 실행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자손은 문과, 상원과, 진사과에 응시를 불허한 법이다.攀攀 이 제정되면서 여성의 일부종사의 정절윤리가 정치적 이데올로기화 되었다. 나아가서 혼인은 유교적인 가정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종교적 명분에서 중요시되었다. 또한 재산상의 상속과 분배문제를 해결하는 양반층의 서얼을 구분하여 신분의 권익과 질서를 세우는 일종의 정치, 경제적 제도이기도 하였다(이효재, 2003).이상의 제반 유교적 가치관과 생활방식은 법제도화와 교화,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농업경제 발전이라는 물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사대부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확산, 강화 될 수 있었다.조선조말 천주교가 서울에 교회를 창설하고(1784년) 동학사상이 창도(1860년)되며 개신교가 만주를 통해서 전파되면서(1887년) 기존의 지배종교였던 유교의 가치관이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신수진, 1998). 1876년 개항, 박영효의「개화에 대한 상소」, 1895년 유길준이 발표한 서유견문의「여자 대접하는 예모(禮貌)」, 기독교선교 기관에 의한 여학교 설립,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의 계몽, 1898년 찬양회로 시작된 여성운동단체의 설립 등 일련의 개혁적 사건들은 1894년의 갑오개혁과 함께 구습과 구제도의 타파, 여성의 해방 등을 중심으로 개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개화의 물결은 1900년대 전후로 출현하기 시작한 신소설과 대한독립 신문을 포함한 여러 신문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신여성에 의해서 그리고「여성」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에 파고들기 시작하였다.攀 신소설에 나타난 남녀 관계 및 혼인관 등은 박민자(2002a 와 2002b)를 참조하고, 개화기, 일제기의 혼인관은 이 배용(1999)을 참고하시오.攀攀 즉 혼인의 상대는 본인의사에 따라 결정해야한다는 자유혼의 필요성, 혼전남녀교제의 필요성, 혼인은 본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혼인의 의미, 조선조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던 축첩혼이 자칫 자유연애혼이라는 미명으로 출현된 신형 축첩혼에 대한 비판, 이혼과 재혼에 대한 논의가 여성의 입장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일제 36년의 강점기가 끝나고 미소군정이 들어서면서 남북분단이 일어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경험하였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극도의 궁핍과 혼란이 지배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세계 2차대전 말기부터 일제에 의한 징용징병으로 많은 가족이 남성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미망인을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