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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계에서는 중고기 이후 신라의 6부가 더 이상 단위정치체로서는 기능하지 않고,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하였다고 보고 있고, 이러한 주장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본고는 새롭게 발굴된 자료인 「월성해자 9호목간」에 의거하여 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6부가 신라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완결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세세한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애초 건국신화 속의 ‘6촌’을 왕경의 6부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만 바라보았던 것도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중성리비」가 발견된 이후, 종래 단순히 6部와 그 예하의 里들을 기록한 목간으로 이해했던, 「월성해자 9호목간」을 새롭게 주목하여 보았다. 이 목간은 중고기에 작성된 것이며, 목간의 묵서에 의하면 習比部 하에 里로 편제된 지역만이 아니라 里로 편제되지 않은 지역단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중고기 이후 6부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어간 것은 분명하지만, 6부의 내부구조는 보다 복잡하였고, 또 6부가 전적으로 왕경이라는 지역범위 내에 한정되는 행정구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분명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큰 틀에서 6부 성격의 변화에서 중고기가 중요한 전환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이전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 기능하던 部의 성격이 중고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월성해자 9호목간」 및 「포항중성리비」 등 신출 자료에 기초해 ‘6부’가 왕경의 6부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입체화해보려고 노력하였다.


Early Silla was composed of 6 divisions which was called 6-Bu(部). The greater part of scholars think that they are believed to have existed in Kyeongju area as some quasi-independent political units at first, but they seem to have changed into mere administrative districts in the early 6th century. In this paper, I tried to find out that 6-Bu system have not changed into mere administrative districts after the 6th century with No.9 wooden tablet excavated at Wolseong(月城垓字9號木簡) and Inscription founded at Jungseong-ri(中城里碑).